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온 무늬에 대하여
우리는 자주 뭔가를 채우며 살아갑니다.
일정도, 마음도, 관계도요.
비어 있으면 괜히 불안해지고,
공백이 있으면 뒤처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반도체 현장도 비슷합니다.
배선 사이에 생긴 작은 빈틈, 보이드(Void).
현장에서는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결함’으로 기록되고,
결국 채워야 할 대상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 빈틈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망가진 자리라기보다
숨이 잠깐 들어갈 수 있는 틈처럼.
상처라기보다
누군가를 조용히 안쪽으로 초대하는 문처럼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기는 결함을 전시해 놓고 평가하는 곳도 아니고,
실패를 늘어놓고 구경하는 곳도 아닙니다.
대신,
기술에서 삶으로,
성과에서 마음으로,
빽빽한 하루에서 잠깐 숨 고를 수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건너오는 통로 같은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여기에는 정답보다 이런 문장이 더 많을 겁니다.
“잠깐 멈춰도 괜찮다.”
“지금도 충분하다.”
공정은 재작업이 가능하지만,
삶은 종종 한 번 지나가면 돌아오기 어려우니까요.
문은 열어 두겠습니다.
천천히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찾는 건
완벽이 아니라,
숨 돌릴 자리니까요.
— JP 정표 | Etch the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