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의자

보이드(Void)의 자리

by JP 정표

텅 빈 의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어 있음은 종종, 허락의 다른 이름이더라고요.
보이드(Void)처럼—결함이라 부르던 틈이, 때론 숨구멍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오늘, 결함의 미술관 첫 작품을 걸어봅니다.




작품명: 보이드(Void)의 자리 (The Seat of Void)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오마주한 4x5 유화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회로와 이글거리는 대지가 화면을 에워싸고 있지만,

그 한가운데 놓인 낡은 노란 의자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합니다.


Void.png [보이드(Void)의 자리]


[도슨트 JP 정표의 한마디]


그 빈자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결핍의 신호’라기보다,

치열한 세상 속에서 내가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여백처럼 보였습니다.


반도체에서 보이드는 채워야 할 결함이지만,
우리 삶의 보이드는 가끔, 숨을 쉬게 하는 여백이더라고요.
(저는 아직도 그 여백에 할 일을 몰래 끼워 넣는 타입이지만요.)


오늘 당신에게도, 앉아도 되는 의자가 하나 있나요?




반도체 배선 사이에도 그런 빈틈이 있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작은 구멍들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걸 보이드(Void)라고 부릅니다.


공정에서는 메워야 하는 결함입니다.
붙어야 할 것들이 붙지 못한 자리,
채워져야 할 것이 채워지지 못한 자리.


그래서인지 저는 한동안
‘빈자리’를 잘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정이 빽빽할수록 마음이 먼저 불안해져서,
그 불안을 일정으로 덮어버리곤 했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약속을 넣고,
잠깐 비는 시간엔 괜히 휴대폰을 더 자주 들여다보고,
조용해지면 일부러 소음을 틀어놓기도 했습니다.


비어 있는 시간을 견디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요즘은 가끔,
그 빈틈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 지나가게 둡니다.
잠깐 멈춰 서서 고요를 허락하는 공간이
오히려 다음 하루를 더 잘 굴러가게 해 주더라고요.




빈 시간은 게으름이 아니라 숨이었다.

저는 요즘 그걸, 조금씩 배우는 중입니다.


보이드(Void)는 여전히 공정에서는 결함입니다.
하지만 삶에서는
그 여백이 바로 불량으로 찍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비어 있는 시간 덕분에
저는 제가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요.
무언가를 더 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잠깐 멈추는 방식으로요.




오늘 제가 봤던 그 텅 빈 의자도

어쩌면 그런 여백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잠시 앉아도 되는 자리.


여러분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자신만의 ‘여백’을 어떻게 지켜내고 계신가요?


— JP 정표 | JP Etch Life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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