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의 계절

by 새파랑

올해 유독 계절감이라는 감각이 선명하게 정련된다. 환절기의 바람결이 결을 달리하니 목과 살갗이 미세하게 간지럽다. 봄이 여름에게 자리를 내어주던 순간은 무심히 흘려보냈건만 가을과 겨울의 문턱에서 느끼는 감각은 유독 서정이 깊어진다. 나의 하루를 채우는 상념들이 결국 이 계절의 언저리를 맴도는 연유일 것이다.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선 옷차림이 홑겹으로 가벼워진다. 그 얇은 옷자락이 사유의 무게마저 덜어냈던 것일까. 겹겹이 껴입는 옷가지의 두께만큼 상념의 깊이도 더해지는 듯하다. 어쩌면 겹쳐 입은 옷의 수만큼 생각의 갈피도 무성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두터워진 옷만큼 무뎌진 육신이 나태해진 정신에 소리 없는 경종을 울리는 까닭일까. 정신은 그 나직한 경고를 쉬이 흘려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분주한 연말 탓에 해가 진 뒤에야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퇴근길,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노을과 이내 그 빛을 삼키는 어스름이 사뭇 낯설게 다가온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님에도 아주 오래 고된 시간에 시달린 듯한 기묘한 착각에 젖게 한다. 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충만함이라기보다 속절없이 쇠미해지는 해를 향한 아쉬움에 가깝다. 아쉬움 탓에 여름밤보다 겨울밤을 쉬이 흘려보내지 못하고 더 더디게 매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쉬움. 겨울 문턱에서 매년 느끼던 정체 모를 수축감의 근원을 나는 퇴근길 어스름 속에서 문득 깨닫는다.


나는 겨울이 지닌 갈무리와 매듭의 질서를 좋아한다. 모든 것을 응결시키고 매듭짓는 그 완강한 기운이 좋다. 모든 마무리는 텅 빈 여백이며, 그 여백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이 깃들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백의 실체는 시각적인 설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대기 속의 후각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봄의 대기는 만물의 태동과 꽃의 만연한 향기로 위태롭게 어지러운 상태이다. 여름의 하늘은 뜨거운 숨결에 섞인 미세한 물방울들로 질식할 듯 옹골차다. 가을의 공기는 그 틈을 느낄 새도 없이 질주하는 바람과 섞여 흔적 없이 소멸한다. 겨울의 숨결은 투명하다. 모든 불필요한 색과 향도 소거된 정지된 공간감이라는 정제된 상태를 지니고 있다. 그 공기는 여름의 과도한 밀도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비어 있는 공백이다. 내쉬고 들이쉬는 폐부의 길을 가장 선명한 윤곽으로 그려내는 유일한 실체이다. 여백을 만드는 하얗고 흰 눈도 사랑한다. 눈의 색,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백색에 대한 애정은 어쩌면 점차 희귀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의 뿌리에서 돋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라는 막연하고 거대한 파문이 언젠가는 한반도의 겨울을, 이 흰 계절의 근원적인 풍경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다는 불안한 예감 때문이다. 이것은 지독히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겨울을 향해 시선이 붙들려 있는 이유는 가을의 소멸을 오늘 아침 문득 느꼈기 때문이다. 한 뼘 더 투명해진 질감에서 알 수 있었다. 나의 사유는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어 가을은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다가올 겨울이라는 미래의 시간이 벌써 오늘 아침의 내 피부에 차가운 실체로 도달한 것이다. 사라지고 있는 것은 비단 흘러가는 계절만이 아니다. 순환의 고리 위에서 생물종들은 소리 없이 서식지를 잃고 그들의 고유한 몸짓과 울음소리가 하나둘 지워져 간다. 한때 세상을 가득 채웠던 것들이 속절없이 빠져나가며 거대한 공동(空洞)을 만드는 과정. 우리는 북극곰의 빙하를 걱정했다.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그들이 역사 속으로 소산 할 것을, 진화와 적응이 오직 인간의 전유물인 것처럼 무수한 동정이 쏟아졌다. 북극곰은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륙에서 새로운 먹이를 찾았다. 결국 살아남고 있다. 표류하는 것은 우리다. 녹아내린 빙하가 해수면을 밀어 올리고, 매년 우리의 터전이 물에 잠긴다. 비움은 다음 생을 품기 위한 장엄한 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물 세상의 주인인 양 행세하지만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 사라짐은 종언이 아니라 전환이다. 겨울의 여백이 봄의 씨앗을 품듯, 오늘의 거대한 여백은 누군가에게는 위기인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지워지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일지도 모른다. 칠천 개의 언어와 팔십억 온기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존재하는 침묵의 토양과 텅 빈 바다에는 우리가 한 번도 호명한 적 없는 어떤 숨결들이 차갑게 움틀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