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째 부모로 살며 느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제주로 오기 전, 나는 이 글을 썼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때의 고민은 결국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5학년이 되었다.
아이는 많이 성장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스무 살의 독립을 향한 준비를 천천히지만 착실히 해 나가고 있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애틋하고 뿌듯하다. 혼자 있는 걸 더 편안해하지만,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과 어울리며 관계 속에서도 잘 버티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큰 장벽 앞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운 지 10년을 꽉 채웠는데, 지금이 제일 어렵다. 예전의 고민들은 책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있었는데, 지금의 고민은 나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라 더 외롭고 막막하다.
나는 나만의 교육관이 있다.
독립.
그래서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이 있었다. 그 길의 끝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이 길이 적어도 아이의 독립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오히려 수월했다. 명확한 기준이 있다 보니, 갈림길에 섰을 때도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명확함 때문에 괴로워진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
나는 10년 가까이 특허 번역을 하며 경제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 일이 곧 사라진다. 사실 민간 분야에서는 이미 번역이 아니라 ‘에디팅’의 시대였다. 이유는 물론, AI 때문이다.
AI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눈앞에서 AI의 양적·질적 성장을 실감한다. 아이가 살아가야 할 10~20년 뒤에는 어떤 직업이, 어떤 세상이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
지식의 암기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제는 인간성, 직관, 공감, 연결, 추론, 창의성 같은 것들의 가치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지금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대한민국 학부모들이 목을 매는 입시를 보면, 우리 때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아이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아이가 5학년이 되면서, 아이의 현실은 여전히 80년대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우리는 ‘학군지’에 산다. 그래 봐야 서울도 아닌데, 이곳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열은 상상 이상이다. 대부분의 아이가 수학학원, 영어학원을 다닌다. 그게 무슨 문제냐 싶지만, 문제는 선행학습과 과도한 학습량이다.
아이 4학년 때부터 중학교 수학을 한다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땐 ‘선행이 무슨 소용이야, 고등학교 가면 다 뒤집히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그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서 같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문제가 달라졌다.
게다가 이 동네의 특징은 하위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공부 못하는 친구가 없다. 그래서 그냥 성향대로 내버려 두면 금세 ‘공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꼭 우리 시절의 ‘꼴통’이거나 ‘일진’이 아니라도 말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학년에 두세 명뿐이라는 말이 들릴 정도다. 반마다 다섯 명쯤은 있어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아이 스스로 위축되고, 늦지도 않았고 능력 부족도 아닌데 자신을 한계 지어버린다.
어른의 생각으로는 10대는 뭐든 도전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시기지만, 아이에게 세상은 소속된 교실과 또래 집단이다.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 이제는 춤 잘 추는 아이, 웃기는 아이, 친구를 잘 도와주는 아이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인정받는다. (어쩌면 엄마들의 시선에서 비롯된 기준일지도 모른다)
요즘은 뼈저리게 느낀다. 외모와 공부, 그게 다인 세상. 비교와 경쟁이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다들 너무 열심히라, 내 노력으로는 뒤집기조차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무기력만 남는다.
도대체 자아상과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고, 나만의 철학은 언제 만들어질까.
우리는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언제, 누구와 함께 고민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해 주기보다 배가 아플까.
나는 왜 너보다 잘해야 마음이 놓일까.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그래서 요즘, 참 힘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