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걷는 하루, 상도문 돌담마을

by 이수정

"여보! 얼른 일어나~"


나는 늦게까지 늦잠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상도문 돌담마을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며칠 전에 실습으로 다녀왔어야 했지만, 하필 그때 A형 독감에 걸려 불참했다. 열은 내렸지만 아직 머리가 멍했고, 혹여 동기들에게 감기를 옮길까 싶어 포기했다. 하지만 과제는 제출해야 한다. 다른 여행지로 쓰자니 속초가 아닌 것이 마음에 걸렸고, 지난 과제를 그대로 내기도 싫었다.


오랜만에 신랑과 단둘이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고 있을 테니 다녀오라는 신랑의 말에 서운한 마음이 스쳤지만, 그래도 그를 일으켜 세워 애교를 부려가며 설득했다. 운전은 당신이 하면 가겠다고 한다. 이 남자, 결혼 전에는 땅끝마을도 자기가 운전해서 데려다줄듯하더니 이제는 조건이 붙는다. 그래도 함께 가겠다는 말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


속초 8경 학무정

도문농요 전수관에 주차한 뒤, 가까운 학무정부터 둘러봤다. 학무정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에 꼭 가보고 싶었다. 속초 8경에 꼽힐 정도이니 웅장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아담한 정자였다. 학무정은 기둥마다 분합문을 걸 수 있는 경첩이 달려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여름엔 사방에서 바람이 통하도록 문을 열고, 겨울에는 호랑이만큼 매서운 설악의 칼바람을 막기 위해 문을 닫아두었을 것이다. 문을 내린 학무정을 상상하니, 수염이 긴 꼬장꼬장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화로를 끼고 앉아 군밤을 굽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그 덕분인지 정자가 한층 친근하게 느껴졌다. 솔숲 속에 자리잡은 정자는 작지만 운치 있고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자의 품격 하나만으로도 속초 8경에 들기에 충분했다.


돌담마을의 마을샘터

학무정을 구경하는 사이 바람이 잦아들고, 해가 올라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허리에 두르고 돌담마을로 향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준 것은 노랗게 물든 벚나무길의 시작점에 있는 마을 샘터였다. 샘터 앞에 놓인 몇 개의 개구리 조형물 덕분에 물이 더 맑고 깨끗할 것 같았다. 졸졸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아니라 수도꼭지를 틀은 듯 펑펑 쏟아지는 물이다. 지금도 물을 떠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마을 사람들의 목을 축여온 고마운 물줄기다. 대체로 옛 마을들은 마을 한가운데에 우물 터가 있는데, 상도문마을의 모양이 배의 형국이라 우물이 없다고 한다. 배의 한 가운데에 물이 솟아오르면 침몰할 테니, 마을 한 귀퉁이에 샘터가 자리 잡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뒷산의 주봉산에서 자연압력으로 물을 끌어온 것이라고 하니, 옛사람들의 지혜가 놀랍다. 신랑은 두 바가지나 들이키며 시원하다고 했다.

마을을 따라 걷다 보니 예쁜 돌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돌담 위에는 동그란 차돌에 참새와 고양이, 강아지들이 그려져있다. 신랑과 나는 보물 찾기 하듯 그림이 그려진 돌멩이들을 찾아다녔다.


전통기와집과 합성수지기와집

이곳은 도문동 한옥마을이라 불렸고, 아직도 대부분의 집이 기와지붕이다. 버스정류장도 한옥마을이라 표기되어 있다. 오래된 전통기와도 있고, 합성수지 기와로 교체한 집도 있다. 나의 외갓집 또한 기와집이라 기와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알기에 합성수지 기와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전통기와는 무겁고 깨지기 쉬워서 유지 보수 또한 어렵다. 반면 합성수지 기와는 가벼워 건물 하중을 최소화하고 설치도 간편해서 유지 보수 또한 쉽다. 가장 좋은 점은 강풍, 폭우, 폭설에도 쉽게 깨지거나 갈라지지 않는다. 바람이 많이 불고 적설량도 많은 설악의 마을에는 안성맞춤인 자재라고 볼 수 있다. 신랑은 옛날 느낌이 사라진 것 같다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것도 좋지만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전통도 일부는 바뀌어야 한다. K 열풍이 불며 한국의 갓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GD도 검은 페도라에 갓끈을 달고 공연을 했지만, 그 누구도 GD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전통은 유연해야 한다. 그래야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오래 이어질 것이다.


송림사잇길

신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돌담길 구석구석을 걷다 보니 마을 끝자락에 '송림사잇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사람 한 명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이다. 소나무 숲속을 걷다 보니 마치 우리가 숲과 하나가 된 느낌이다.


송림쉼터에서 바라본 돌담마을

마을과 조금 떨어진 산책로 끝에 작은 쉼터가 있었다. 쉼터에서 마을을 바라보니 맑은 개울과 갈대, 초록의 송림과 푸른 가을 하늘이 어우러져 수채화 같았다. 나이가 들면 신랑과 함께 이런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 잡고 있던 손이 따뜻한 게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천천히, 아무 걱정 없이 둘만의 길을 걸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과제를 핑계로 떠난 하루였지만, 결국은 오랜만에 마음을 맞대는 시간이었다.


“여보, 같이 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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