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여든 이후, 삶이 이야기가 되다

3. 철수씨 이야기(2)

by 유정인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다


철수씨는 사별 후, 아내와 함께 살았던, 추억과 삶의 흔적이 가득한 집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시간이 흐른 뒤, 아내가 그리울 때면 자연스레 S병원 호스피스 병동이 떠올랐다. 아내는 재발 후, 할 수 있는 치료와 도움을 모두 받았지만, 결국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고 그 병동으로 옮겨 세상과 작별을 준비했다. 그곳에서 의사와 간호사, 봉사자들은 한결같이 환자를 정성껏 돌보고 위로했다. 담당 수녀는 자주 찾아와 기도하며, 아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왔다. 철수씨 가족이 떠나보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그 마음을 헤아리며 곁을 지켜주었기에, 그는 점차 힘을 내어 이별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를 떠나보낸 뒤, 그는 상실의 깊은 슬픔에 압도되었다. 평생의 동반자를 잃은 고독은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왔고, 오랜 시간 익숙하게 살아온 일상의 풍경마저 텅 빈 무대처럼 느껴졌다.


가족 사별의 아픔


그의 어머니는 늘 집안일과 밭일에 파묻혀 살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일손을 움직였고, 어린 철수 씨 역시 농사일과 동생들 돌보는 일을 맡아 어머니의 짐을 함께 나눴다. 가족을 위해 몸을 다 바치던 어머니는 마흔을 채 앞두고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맹장염이었다. 지금 같으면 간단한 수술로 회복될 병이었지만, 당시 농촌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없었다. 멀리 읍내로 나가야 했고, 교통편이 귀해 어머니를 구루마에 싣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병원에 닿았을 때는 이미 감염이 깊숙이 퍼진 뒤였다. 허망하게도, 손쓸 새도 없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8년 전 어느 날, 철수씨 부부에게 삶은 참혹한 아픔을 안겼다. 귀하게 키운 큰아들이 스물아홉, 한창 인생을 펼치려던 나이에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들은 마음이 여리고, 사회생활에도 소극적이었지만, 힘겹게 진로를 정하고 취업하여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참이었다. 응급실을 전전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황망히 떠나버린 아들. 철수씨 부부에게 그것은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이미 어머니와 사별한 아픔을 겪은 뒤였기에, 다시 찾아온 아들의 죽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아내가 오랫동안 너무 힘들어했기에, 철수 씨는 자신의 고통과 눈물을 차마 드러내지 못한 채 가슴 깊이 묻어야 했다. 슬픔은 말없이 그의 일상에 그림자로 남았다.

"생떼 같은 아들이 하루아침에 갔으니 기가 막힌 사연을 말해 뭐해요. 아들이 고열이 나서 병원으로 가는데

지금같이 119가 잘 돼 있지도 않고, 아들을 싣고 이 병원 저 병원 응급실을 찾아서 돌아다니다 갔어요. 그

후 집사람은 실성한 사람같이 살았지. 나는 슬퍼도 일하며 잊으려 애썼지만, 나까지 무너지면 안되니."


아들을 잃은 상처가 조금씩 안정되던 어느 날, 철수씨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아내가 직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들이 떠난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내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빗줄기 속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흐느끼던 그녀의 모습은 철수씨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로부터 7년 후, 아들의 부재로 고통스러웠던 아내는 직장암과 맞서야 했다. 수술과 치료를 거치며 한동안 회복의 기미를 보였지만, 3년 만에 암은 재발했고, 결국 66세의 나이로 그녀는 저세상으로 떠났다. 어머니와 큰아들에 이어 소중한 반려자를 잃은 그는, 다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아내 이야기


철수 씨는 스물여섯 살에 중매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8남매 중 외동딸이었고, 큰오빠가 서울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았다. 생활력이 강한 아내 덕분에, 철수 씨는 안심하고 동생들 7명의 뒷바라지에 힘쓸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동생들이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 한 칸을 마련해 독립할 수 있도록 부모 역할을 대신해 준 것이다. 철수 씨는 평생 아내가 함께 고생하며 동생들을 돌봐 준 것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공무원의 박봉으로 집안을 꾸리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아내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해냈고, 그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토록 강인한 아내가 암에 걸리자, 철수 씨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병원 치료는 물론,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내어 아내 곁에서 손을 잡았다. 아내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애썼지만,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늘 함께 움직였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잉꼬부부’라 불렀다. 평생을 함께하며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식을 키워낸 아내를, 철수씨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존재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며, 추억과 사랑으로 남아 있다.


그는 지금도 가끔 교외로 나가면 나비를 찾는다. 아내가 정말 나비가 되었을까. 아내의 장례는 5일 장으로 치러졌다. 그녀는 성당 신심 단체에서 활동하며, 지역사회 의용소방대에도 참가해 교제의 폭이 넓었다. 장례식장에 조문이 많이 왔고, 들어오는 꽃들은 영안실로 향하는 복도에 나란히 놓였다. 그때 어디선가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꽃 사이를 날아다녔다. “나비가 되었구나!”문상객들은 모두 한마디씩 말했다. 나비가 영안실 안까지 날아들자,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운 마음으로 하얀 나비를 바라보았다. 철수씨는 문득 아내 생각이 날 때마다 꽃 사이에서 나비를 찾곤 하였다. 나비가 보이면, 그는 마치 아내를 다시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아내와 함께한 추억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도 서서히 잦아들고, 결혼한 두 자녀에게서 4명의 손주가 태어나면서 가족은 점점 더 풍성해졌다. 42년간의 공무원 근무를 마치고 퇴직한 뒤, 부부는 여러 여행을 다니며 여유로운 시간을 누렸다. 그가 행복했던 시절은 은퇴 직전, 지방에서 근무하며 주말부부로 살던 때였다. 그곳에서는 친목회원들이 자주 놀러 와 자연 속에서 함께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곤 했다. 봄과 가을이면 부부 동반으로 모인 인원이 30명에 달했고, 물고기를 잡고, 염소 서너 마리를 잡아 고기를 먹고, 뼈를 우려 국물까지 맛보며 종일을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 함께 웃던 사람 중,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주는 쓸쓸함 속에서, 그는 그 시절의 풍성한 웃음과 정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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