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의 역설

내가 보는 순간 변하는 것들

by Henri

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물이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감각이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본다는 것은 단방향의 행위가 아니다.

시선은 창문이 아니라 문이다.

내가 대상을 향해 열면 대상도 나를 향해 열린다.

그리고 그 열림과 함께, 보기 전의 풍경은 조용히 물러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 세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위치를 정확히 알려는 순간 속도는 흐려지고, 속도를 붙잡으려는 순간 위치는 번진다.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가 대상을 변형시킨다.


빛이 없이는 볼 수 없고, 빛은 반드시 대상에 닿는다.

닿는다는 것은 건드린다는 뜻이다.

순수하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바라보는 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역설은 사람 앞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자연스럽던 자세가 어색해지고 숨소리마저 낯설어진다.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열쇠구멍 너머로 구경하던 나는 자유로운 의식이었으나,

누군가 나를 보는 순간 하나의 구체적인 ‘존재’로 굳어진다.


보인다는 것은 비로소 형태를 얻는 일이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장미’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붉고 향기로운 감각의 흐름은 하나의 틀 안에 멈춘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이누이트가 눈의 종류를 수십 가지 단어로 나눠 부르는 것처럼,

언어는 우리가 보는 세계의 지형 자체를 바꾼다.


사랑의 시선도 다르지 않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받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고,

의심받는 사람은 의심을 증명하듯 굳어간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그 사람을 우리 앞에서 어떻게 존재하게 할지를 결정한다.


인간은 타인의 눈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최초의 거울은 유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눈이었다.


노자는 말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포착하려는 순간 실재는 미끄러진다.

그러나 역설을 해결하려 애쓰는 대신 그 안에 머무는 길이 있다.


명상자들이 말하는 텅 빈 마음

움켜쥐지 않고, 가두지 않고, 흐름과 함께 있는 바라봄.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그 생각은 이미 이전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글은 생각을 담은 그릇이라기보다,

생각이 언어가 되는 과정에서 함께 태어난 또 하나의 형태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바라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함께 지어갈 수는 있다.

관찰자의 역설은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세계의 공동 창작자라는 증거다.


다시 물 앞에 앉는다.

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물이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이제 알 것 같다.

물이 실제로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물을 보는 동안 바라봄 자체가 우리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잠시 같은 흐름 속에 머물게 했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 세계는 계속 다시 태어난다.

그 다시 태어남 속에 나도, 당신도 있다.


Hen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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