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세계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by Henri

빗소리는 언제나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기억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아닌, 나와 세계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자리.

지붕을 두드리는 한 방울은 태평양이기도, 구름의 안쪽이기도, 누군가의 숨결이기도 하다.

그 물방울 하나가 품은 시간은 지구의 나이만큼 길다.


오래도록 나는 이 감각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대상을 오래 바라보면 윤곽이 흐려지고,

장미 한 송이는 더 이상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과정의 한 장면이 된다.

붉음과 향기와 형태가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입자들의 잠깐 배열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이 사물을 더 정확히 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세계가 서로 얽혀 있다는 말은 흔하지만, 그 말이 체험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부재 앞에서, 오래된 나무껍질을 만지며, 새벽 빗소리를 들을 때.

그때 연결은 관념이 아니라 감각이고,

나는 고립된 점이 아니라 넓은 흐름 속의 파동이 된다.


언어는 그 감각을 붙잡으려 할 때마다 나를 멈추게 한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흐름은 사물이 되고, 경계가 다시 단단해진다.

그러나 말로 다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다.

미끄러져 남는 것들이 더 깊이 박힌다.


우리가 진리라 부르는 것들조차 오래된 비유의 퇴적물일 뿐이다.

이해하고, 파악하고, 개념 짓는 모든 행위 안에 이미 손과 몸의 움직임이 들어 있다.

은유 바깥의 세계를 우리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세계 자체가 거대한 은유의 연쇄 아닐까.

돌은 강을, 강은 구름을, 구름은 바다를, 바다는 다시 돌을 가리킨다.

각 존재는 서로를 비추며 의미를 얻고,

세계는 닫힌 책이 아니라 서로를 번역하는 문장들의 흐름이다.


어느 아침 이슬 맺힌 거미줄 앞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다른 물방울을 품고, 그 안의 반사가 또 다른 반사를 낳는다.

하나의 구슬이 전체를 담고 있었다.

세계는 이미 스스로를 비추고 있었다.


내가 이 문장을 쓰는 것도 수많은 목소리와 시간이 통과한 결과다.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면 별의 폭발과 우주의 먼지에 닿는다.

내 몸의 원자는 사라진 별의 잔해이고,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오래된 숨이 섞여 있다.

‘나’라는 경계는 분명하지만 물결처럼 유동적이다.


연결은 낭만이 아니라 구조이고, 감상이 아니라 역사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때로 거리를 둔다.

연결을 말하면서 분리를 선택하는 모순을 부정하지 않겠다.

인간은 경계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을 넘고 싶어 한다.


이 사유는 삶을 대신하지 않지만 걸음을 바꾼다.

분리의 감각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방식임을 일깨운다.

작은 균열이 생긴다.


지금 쓰는 단어들조차 내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입을 거쳐 온 것들이고, 내 문장에는 사라진 목소리들의 잔향이 남아 있다.

‘나의 생각’마저 세계가 잠시 나를 빌려 흐르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세계가 은유처럼 작동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비유다.

나는 세계를 설명하려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자신을 잠시 드러내는 통로일 뿐이다.

그 생각은 나를 동시에 무겁게 하고 가볍게 한다.


창밖에는 다시 비가 내린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물이 지붕을 두드린다.

바다였을 수도, 구름이었을 수도, 오래전 생명의 혈관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증명할 수 없지만,

그 소리가 아름답고 나를 조금 더 넓고 고요하게 만든다는 것만 안다.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빗소리 앞에서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개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설명이 아니라 침묵으로 세계와 만나는 그 자리.


질문하는 인간은 아마 그 방향으로 걷고 있을 것이다.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길 위에서.


Henri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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