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선을 긋는 일에 대하여
사과 하나가 있다.
나는 그 말을 내뱉고 잠시 바라본다.
두 음절이 공중에 머물다 저 붉은 사물 위에 내려앉는 순간, 사물은 이름 아래로 물러난다.
마치 처음부터 그 이름이 곧 그것이었던 것처럼.
이 장면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다.
우리는 매일 사물을 이름으로 가두면서도 그 기이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다만 이름을 모르는 것 앞에서만 잠시 멈춘다.
낯선 시장에서 처음 보는 과일은 색과 질감, 냄새로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름을 아는 순간 그 또렷함은 한 걸음 물러선다.
개념이 들어서는 자리에 사물은 비켜선다.
태초의 세계는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웅웅 거리는 혼돈의 꽃망울”이었다.
빛과 소리와 온기와 무게가 아직 구획되지 않은 채 뒤섞여 흐르는 상태.
거기에는 어머니도, 배고픔도, 낮과 밤도 없었다.
세계는 통째로 있었다.
아이는 그 덩어리를 나누기 시작한다.
반복 속에서 닮음과 차이를 가른다.
이것은 같고 저것은 다르다.
그 작은 구분들이 쌓여 개념이 된다.
개념은 흐르는 세계 위에 인간이 그어놓은 선이다.
강은 계속 흐르는데 우리는 선을 기억하고,
어느 순간 그 선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믿는다.
그러나 그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세계 안에 이미 새겨져 있던 것을 발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새로 긋는가.
플라톤은 발견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원의 형상은 이미 존재하며, 우리가 그리는 원은 그 그림자일 뿐이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풀 때 우리는 종종 그 인력에 끌린다.
어떤 개념들은 우리가 도달하기 전부터 우주 어딘가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개’를 떠올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허스키와 치와와 사이에 단일한 형상이 있는가.
늑대와 개의 경계는 어디인가.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개념의 가장자리는 늘 흐릿하다.
그 흐릿함은 개념이 발견이라기보다 구성에 가깝다는 증거다.
우리는 세계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틀로 묶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사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개념은 사물들에 공통된 본질을 포착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 한 문장은 문이 된다.
무엇을 안으로 들이고 무엇을 밖으로 밀어낼지 정하는 문.
문 밖에 남은 것들은 어디로 가는가.
이름 붙여지지 못한 것들의 침묵은 어디에 머무는가.
칸트는 질문의 자리를 바꾸었다.
세계가 어떠한가 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어떤 조건을 지니는가를 물었다.
시간·공간·인과성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틀이다.
우리는 언제나 안경을 쓰고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안경을 벗을 수 없다.
우리는 사물 자체에 닿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틀을 통과한 세계뿐이다.
개념은 세계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 언어의 경계를 더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말할 수 없는 것들
음악이 끝난 뒤의 여백,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감각, 오래된 친구와의 침묵은 어디에 놓이는가.
언어는 빛이면서 동시에 그림자를 만든다.
그럼에도 사물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을 붙여도 사과는 그 이름을 넘쳐흐른다.
사과는 씨앗에서 싹으로, 꽃으로, 열매로, 다시 흙으로 이어진다.
“사과”라는 개념은 그 흐름의 한 지점을 붙잡은 표지일 뿐이다.
베르그송은 개념이 정지의 언어라면 생명은 지속이라고 말했다.
수천 장의 사진을 이어 붙여도 나비의 비행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는 몸에서 그것을 보았다.
자전거 타는 법은 문장으로 완전히 전수되지 않는다.
몸은 개념 이전의 앎을 지닌다.
이 사실은 위안이다.
개념은 사물을 완전히 가둘 수 없다.
이름 아래에도 언제나 넘쳐흐르는 잔여가 있다.
그 잔여가 세계를 살아 있게 한다.
그러나 개념은 무고하지 않다.
“이방인”, “비정상”, “열등하다”라는 이름은 수많은 삶을 가두었다.
한 인간의 복잡한 생이 단어 하나에 봉인될 때, 그 바깥의 대부분은 지워진다.
이름이 먼저 죽이고 칼이 뒤따른다.
푸코가 지적했듯 개념은 이해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장치다.
누가 선을 긋는가.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개념을 멈출 수 없다.
개념 없이는 기억도, 정리도, 소통도 불가능하다.
“그리움”이라는 한 단어가 서로 다른 삶을 잠시 겹치게 하고,
그 불완전한 겹침이 공동체를 만든다.
개념의 역사는 수정과 갱신의 역사다.
“열소”는 사라지고 “산소”가, “에테르”는 물러나고 “전자기장”이 들어섰다.
철학 개념들 또한 시대마다 다듬어지고 교체된다. 개념은 사물 앞에서 반복해 미끄러지고, 그 미끄러짐 속에서 다음 개념이 태어난다. 개념은 언제나 도중에 있다.
다시 사과로 돌아온다.
나는 그것을 사과라 부른다.
그 이름 덕분에 당신에게 사과를 건네 달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음절이 담지 못한 것들
표면의 요철, 빛의 결,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그러나 지도 없이 우리는 길을 찾기 어렵다.
사유란 이 긴장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선을 긋되 그 선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것.
이름을 부르되 이름 아래에서 계속 흐르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사과는 아직 거기 있다.
조금 더 익었다.
나는 여전히 그것을 사과라 부른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을 말할 때, 담지 못한 것들의 무게와 숨결을 함께 느낀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