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사이로 내민 손
비트겐슈타인의 한 문장이 나를 멈추게 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그 문장은 페이지 밖으로 나와 일상을 따라다녔다.
밥을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잠들기 직전 천장을 볼 때마다 되살아났다.
처음엔 지적 흥분인 줄 알았지만, 느낌은 더 낮고 서늘했다.
오래 살아온 방의 벽을 짚다가 그것이 ‘벽’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과 비슷했다.
방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져 있었다.
언어가 생기기 전에 세계가 있었을까,
아니면 언어가 열리면서 세계도 열린 것일까. 우리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언어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세 살 전의 나는 기억 속에 없다.
그 시절의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이가 울음으로 토해내던, 아직 이름 없는 감각들을 떠올린다.
배고픔인지 외로움인지 두려움인지 구분되지 않은 채 뭉쳐 있던 그것들.
이름이 붙는 순간 분리되고, 이전의 총체성은 희미해진다.
언어는 경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번역한다.
번역은 늘 원본과 어긋난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그 어긋남 위에 세워져 있다.
소쉬르는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분절한다고 했다.
연속된 색의 스펙트럼을 우리는 빨강·주황·노랑으로 자른다.
그 선은 자연이 아니라 언어에 있다.
러시아어 화자들은 연한 파랑과 짙은 파랑을 따로 불러 더 빠르게 구분한다.
더 잘 보는 게 아니라 다르게 본다.
그 사실 이후로 일상의 선들이 낯설어졌다.
슬픔과 외로움, 사랑과 집착, 그리움과 후회.
이 경계들이 세계에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쓰는 언어가 그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선 바깥에 아직 이름 없는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포르투갈어의 사우다드, 독일어의 제란트주흐트, 한국어의 한.
이 단어들이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 것은 대응어가 없어서만이 아니다.
그 언어를 살아온 시간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슬프다”라고 말할 때 같은 곳을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불확실함은 소통을 기적처럼 만들면서도 늘 어긋날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런데 그 어긋남이 사람을 더 소중하게 만든다.
불완전한 언어로도 닿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려 말문을 고를 때마다 감정은 문장 사이로 빠져나갔다.
처음엔 내 부족함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 자체의 조건에 가깝다.
언어는 감정을 온전히 담지 못하고 닮은 그림자만 그린다. 두께 없는 그림자.
그럼에도 우리는 말한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다.
창살은 그대로지만 손은 그 사이로 나아간다.
완전한 탈출도, 완전한 갇힘도 아닌 그 지점에 우리의 언어가 있다.
침묵으로 답을 찾으려 했던 적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 문장은 위안이었다.
하지만 침묵을 의식하는 순간 침묵마저 언어의 사건이 된다.
탈출 시도조차 같은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
체계는 지나치게 정교하다.
그래서 이 화두는 쉽게 놓이지 않는다.
답을 주지 않으면서 질문의 틀 자체를 흔든다.
벽을 부수는 대신 잠시 벽을 잊게 만드는 틈.
그 틈이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유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결국 처음 문장으로 돌아온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무엇을 바꾸는가.
어떤 날은 허무하고, 어떤 날은 그 질문이 아름답다.
아직 결론은 없다.
다만 한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만 안다.
한계를 아는 것이 곧 넘어선 것은 아니지만, 한계에 무너지는 것과는 다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직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평생 그 말을 찾는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가까이 가려 한다.
번역이 완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철학이고, 시이고, 사랑이다.
창살 사이로 내민 손.
이름 없는 바깥의 공기.
단어가 없어도 손이 닿는 그곳.
그것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기를.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