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세이티(Haecceity): 나의 나다움에 대하여

나다움의 지반: 하이세이티와 무아의 대화

by Henri

거울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다.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그 배열이 '나'라는 얼굴을 이루고 있음을.

그러나 시선을 거두지 않고 한참을 버티면,

익숙한 윤곽이 서서히 풀려나가며 낯섦이 스며든다.

그 낯섦이 깊어질수록 형태는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오래 반복해 읽은 단어가 의미를 잃고 순수한 소리만 남듯,

얼굴이 잠시 '얼굴'이기를 멈추고 그저 한 형태로 환원되는 순간.

두려움과 청명한 경이로움이 뒤섞여.

익숙한 것이 낯설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에 진정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물음이다.

13세기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는 평생 이 간극을 파고들었다.

그는 보편 개념의 한계를 직시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둘 다 인간이지만,

그 정의들을 아무리 쌓아 올려도

소크라테스가 왜 플라톤이 아닌지에 닿지 못한다.

스코투스는 그 메워지지 않는 자리에 이름을 붙였다.

Haecceitas.


이것임(thisness).

얼마나 소박하면서도 무한한 이름인가.

하이세이티는 어떤 속성도 아니다.

그것은 묘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층위에 있다.

속성이 아직 들러붙지 않은,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것'인 자리.

개별자의 개별성을 떠받치는 형이상학적 지반.

스코투스는 그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논증으로 가리킬 수 없으나,

개별자가 개별자인 한 반드시 있어야 할 무언가.


처음 이 개념을 만났을 때, 나는 반발했다.

검증 불가능한 원리를 철학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수십 년 만에 만난 사람을 단번에 알아보는 순간,

그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의 세포는 여러 번 교체되었고,

기억은 변했으나 무언가가 변함없이 그를 그이게 한다.

목소리의 미세한 결,

눈을 찡그리는 방식,

혹은 그 너머의 더 깊은 무언가.

하이세이티는 그 설명 불가능한 알아봄이 가리키는 자리를 위한 이름이다.

개념이라기보다는,

침묵에 새긴 표지판에 가깝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완전히 동일한 두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A와 B가 모든 속성에서 구별 불가능하다면,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개별성은 정교한 속성들의 집합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신비로운 '이것임'은 필요 없다.


나는 그 논리를 읽을 때마다 우아함에 항복한다.

그러나 나와 완전히 동일한 속성의 복사본을 상상하다 균열이 생겼다.

같은 DNA, 같은 기억, 같은 상처의 역사.

그것은 나의 복사본이지, 내가 아니다.

이 차이는 어떤 속성의 차이도 아니다.

나다움은 내가 가진 것들의 목록이 아니다.

그 목록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기억은 지워지고, 신념은 뒤집히고, 몸은 낡는다.

그 낡음을 견디는 '이것'은 목록의 항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다른 언어로 같은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짐으로 안고 사는 존재자다.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있어야 할지를 묻는다.

존재 방식이 곧 본질.

나의 나다움은 태어날 때 주어진 코드가 아니라,

살아가는 매 순간 수행되는 무언가.


사르트르는 과감하게 말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나는 먼저 존재하고, 그 존재함으로 본질을 만든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현기증이 온다.

만약 나다움이 선택의 누적이라면,

다른 선택을 한 '나'도 나였을까.

실존주의의 자유는 때로 지반을 허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불교는 가장 불편한 답을 내놓는다.

고정된 자아는 없다.

무아(無我).

'나'라는 것은 조건들의 일시적 집합이며,

그것을 실체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용수의 공(空)은 더 냉정하다.

어떤 존재자도 홀로 서 있지 않는다.

그 의존들을 모두 걷어낸 자리에

순수한 '나'의 핵이 남을 거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그런데 이 차가운 심연에서 뜻밖의 빛을 만났다.

비어 있음은 허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사건으로서의 나.

지금 이 순간, 이 인연들의 교직이 현시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이것임'이다.

스코투스와 용수는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같은 절벽의 서로 다른 면을 타고 내려가고 있다.

나는 어떤 보편으로도 포획되지 않는다.


이상한 역설이 있다.

나의 이다움을 가장 잘 알아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러나 실은 정반대다.

타인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해 말하려 하면 말이 배반당하는 기분이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다"라고 하면 냉담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어떤 진술도 나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나는 항상 내 진술을 초과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다.

나다움은 어쩌면 그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진술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의 현장이다.

나는 그것을 해명하지 않고, 살아낸다.

그 행위 속에서 이것임이 작동한다.

이미 진행 중이다.


헤겔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자기의식은 타자와의 마찰로만 자신을 안다.

나다움은 고요한 내면에서 증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마찰 속에서,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낯선 잔상 속에서 형태를 얻는다.


나는 오랫동안 나다움을 찾으려 했다.

어딘가에 잠든 본래의 나를 발굴하면 된다는 듯.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다움은 발굴되는 것이 아니다.

땅속 보물이 아니라,

걸어가는 방식 속에 이미 새겨진 것이다.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고 있는 것.


하이세이티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무언가다.

그것을 확정하려는 순간, 이미 작아진다.

자신의 나다움을 너무 단단히 쥐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에서 멀어진다.

반면,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그 모름의 한복판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도 본다.

모름은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거울 앞으로 돌아간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이 얼굴의 배열이 아니다.

기억의 총량도, 신념의 목록도, 선택들의 합산도 아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세계와 맺어온 방식의 안쪽,

아직 맺지 못한 가능성의 아래에 조용히 흐르는 방향성이다.

내가 놀라는 방식, 상처받는 방식, 침묵하는 방식,

그럼에도 다시 걷는 방식.

그것들 각각은 나다움의 증거가 아니라,

그 모두를 관통하는 무언가의 현시다.


스코투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어떤 종류의 것이기 이전에, 이것이다.

분류되기 전에, 평가받기 전에, 이름 지어지기 전에,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이 하나다.

그 이것임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미 하이세이티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이 나를 본다.

나는 이제 그 낯섦을 밀어내지 않는다.

낯설다는 것은,

내가 아직 나 자신을 다 살지 않았다는 가장 정직한 표시다.

나는 미완이다.

그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은 주로 감사하다.

미완이라는 것은,

존재가 아직 열려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임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 있는 한.


Henri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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