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는 의미를 만든다
밤이 깊어지면 사람은 이상한 질문을 한다.
낮의 소음이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해진 뒤에야,
오랫동안 삼켜두었던 물음이 떠오른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그 물음이 처음으로 내 가슴을 파고든 건,
아무 일도 없던 늦가을 오후였다.
창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박혀 있었다. 내가 그냥 외면했을 뿐.
어떤 질문들은 답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앉아 함께 숨 쉬어 달라고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쉽게 위로하지 않겠다.
“삶은 아름답다”는 말도, “너는 소중하다”는 말도
거짓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 말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성급히 건네는 다정함은
때로 그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먼저 삶이 얼마나 버티기 힘든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다.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를 붙들고 있는
무언가를 함께 더듬고 싶다.
강한 척도, 아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이렇게 열었다.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책을 덮었다.
너무 날카로웠다.
그러나 곧 알았다.
카뮈는 죽음을 권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만
삶을 진정으로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기 위해 삶을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며 산다. 눈을 감고 걷듯이.
카뮈는 그 어긋남을 ‘부조리’라 불렀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는데 세계는 침묵한다.
그 침묵과 외침 사이의 간극이 부조리다.
그는 그 간극을 뛰어넘지 않았다.
신앙으로도, 허무로도 도망치지 않았다.
부조리를 그대로 끌어안고 반항하며 사는 길을 택했다.
시지프를 생각해 보라.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굴러 떨어진다.
철저히 무의미한 노동.
그럼에도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안다.
알면서도 다시 바위를 향해 내려간다.
그 눈 뜬 선택, 그 반항 속에
인간의 존엄이 있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기에
우리가 의미를 창조한다.
그 창조 행위 자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니체는 더 어두운 곳에서 출발했다.
“신은 죽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라
인류가 기대어 온 모든 초월적 가치의 붕괴였다.
그는 허무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두 종류의 인간을 보았다.
쓰러지는 자와, 허무를 딛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초인은 스스로 가치를 불 위에서 벼리는 사람이다.
삶의 의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 위에서 두 손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니체는 가장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너는 이 삶을 다시 살겠는가?”
고통과 후회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가.
그것이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긍정이다.
진짜 지옥에서 이 질문을 살아낸 사람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
그는 수용소 안에서 보았다.
같은 절망 속에서도 어떤 이는
마지막 빵 조각을 남에게 주었고,
어떤 이는 먼저 무너졌다.
외부 조건이 인간의 반응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에게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선택의 공간이 있었다.
철조망 안에서도 그 공간은 살아 있었다.
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 아내를 현재형으로 간직했다.
언젠가 이 경험을 강의할 날을 상상했다.
미래의 가능성이 지금의 고통을 버티게 했다.
그는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방법으로 살아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정면으로 보라고 했다.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 회피가 우리를 남의 삶대로 사는
비본래적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이 선명해진다.
죽음은 삶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삶에 윤곽을 그려준다.
그래서 오늘의 석양, 오늘 마주친 눈빛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 된다.
벚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다.
유한성이 아름다움의 조건이다.
스피노자는 몸의 언어로 말했다.
모든 존재에게는 ‘코나투스’가 있다.
자신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근원적 힘.
돌도, 식물도, 인간도 마찬가지다.
기쁨은 그 힘이 커지는 순간이다.
사랑할 때, 이해할 때,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많이 존재하게 된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때로 논리보다 먼저 몸 안에 있다.
심장이 뛰고, 폐가 숨을 쉬고,
손이 무언가를 만지고 싶어 하는
그 모든 것.
고통은?
어떤 슬픔은 너무 깊어서 언어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찾아온 고통이 나를 완전히 부수지 못하게 할 때,
그것은 때로 더 깊은 무언가를 열어준다.
금이 간 도자기를 금으로 메우는
킨츠기처럼.
프랭클은 말했다.
고통은 의미가 있을 때 비로소 고통이 된다.
의미조차 없을 때 그것은 절망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윤리의 근원을 보았다.
그 얼굴은 “나를 외면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누군가 때문에 가장 강하게 살아난다.
아이를 위해 버티는 부모,
친구의 한 통 전화가 어둠을 가르는 순간.
내가 사라지면 생기는 빈 공간은
존재의 증거다.
불교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삶의 의미는 거대한 목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 안에 있다고.
차 한 잔의 온기, 빗소리,
오래된 친구의 목소리.
이 사소한 것들 안에 삶의 전부가 있다.
이 질문을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이미 삶과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씨름 자체가 살아있음의 증거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웅장한 명제가 아니다.
내일 마시고 싶은 커피일 수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 한 권일 수도 있고,
오늘 밤 보내야 할 문자 한 통일 수도 있다.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이
사실 가장 진실한 이유들이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아직 모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쓰이는 중이다.
마지막 문장이 어떻게 끝날지는
오직 끝까지 읽은 사람만이 안다.
Hen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