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기만: 보이는 것은 진실인가

눈을 감는다

by Henri

눈을 감는다.

세계가 사라진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것을 향해 열어두었던 유일한 창을 조용히 닫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눈꺼풀의 얇은 막 하나가 존재와 부재를 가르는 이 순간,

오래된 현기증이 밀려온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본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은,

과연 거기에 있는가.


어린 시절, 새벽의 그 찰나를 두려워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꿈은 스스로 꿈임을 알리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나는 완전히 깨어 있었고,

완전히 확신했다.

눈을 뜨는 순간,

세계가 뒤집히는 아찔함

방금까지 진실이었던 것이 한순간에 허상이 되는 전복

그것이 가르쳐준 것은,

확신이 결코 진실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가장 철저한 환영 속에서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의심 없는 상태야말로,

가장 깊은 함정이다.


플라톤은 기원전 4세기에 동굴의 비유를 그렸다.

사슬에 묶인 채 벽에 드리운 그림자만을 보며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그 행렬이 전부인 세계였다.

그들은 행복할까.

아마도. 의심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플라톤이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 행복이었다.

빈틈없는 완결, 균열 없는 확신.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고한 어둠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에게 조용히 묻고 싶다.

동굴 밖의 빛을 직시했다고 믿는 그 확신은,

또 다른 동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어떤 동굴 안에 있다.

다만 그 형태가 달라질 뿐.

계몽은 완전한 탈출이 아니라,

더 넓은 동굴로의 이주인지도 모른다.

빛을 향해 걷는 길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1641년 겨울,

데카르트는 서재에 홀로 앉아 모든 것을 의심하기로 결심했다.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수학적 진리마저.

전능한 악마가 우리의 감각에 거짓을 심어준다면.

불꽃의 뜨거움, 하늘의 파랑, 어머니의 얼굴

모든 것이 그 공작이라면.


이 사유 실험은 오늘까지 살아 있다.

우리는 꿈을 꾼다.

죽은 이와 대화하고,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비 오는 골목을 걷고,

추락의 공포에 몸을 떤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그것을 현실로 믿는다.

꿈의 내부에서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이 문장을 쓰고, 당신이 그것을 읽는 이 순간도.


데카르트는 의심의 끝에서 하나의 부동점을 건져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빛나는 발견.

그러나 이 명제 앞에서 늘 이상한 고독을 느낀다.

그는 생각하는 ‘나’를 건졌지만,

그 ‘나’를 둘러싼 세계는 여전히 안갯속에 남았다.

확실한 것은 생각의 내부뿐.

외부는 증명을 기다리는 광막한 어둠이다.


색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창밖 하늘이 파랗다면, 그 파랑은 어디에 있는가.

공기 분자들은 색이 없다.

그저 특정 파장의 빛을 산란시킬 뿐.

그 빛이 눈에 들어와 망막을 자극하고,

신호가 뇌로 전달된다.

뇌의 어느 지점에서 파랑이라는 경험이 피어난다.


그 선명하고 차갑고 광활한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전자기파 안에도, 세포 안에도, 뉴런 다발 안에도 없다.

그것은 세계 안에 미리 놓인 것이 아니라,

세계와 몸과 뇌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색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들어지는 자리,

그 중간 어딘가에 ‘현실’이 서 있다.


칸트는 이 통찰을 인식 전체로 확장했다.

우리의 마음은 백지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를 경험하기 이전부터

시간과 공간, 인과율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세계는 이 틀을 통과한 후에야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구조가 빚어낸 현상을 본다.


오늘날 신경과학은 이 오래된 통찰을 다른 언어로 되풀이한다.

뇌는 감각 신호를 수동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측하고 보정하고,

때로는 없는 것을 채워 넣는다.

망막의 맹점처럼, 우리는 구멍을 인식하지 못한다.

보는 것은 이미 해석이다.

해석 이전의 순수한 ‘봄’ 같은 것은 없다.


언어도 이 구성의 공모자다.

러시아어에는 하늘색과 짙은 파랑을 구별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

그 화자들은 그 색들을 더 빠르게 구분한다.

한국어에서 ‘파랗다’가 초록 신호등을 가리키듯,

우리는 언어가 미리 그어놓은 경계와 함께 본다.

단어는 세계를 쪼개는 칼이다.

우리는 언어가 허락한 방식으로 세계를 자르고,

그 조각들을 세계라 부른다.


타인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사람 자체를 보지 않는다.

비슷한 기억, 사회의 분류 틀,

순간의 두려움과 욕망이 먼저 그를 빚는다.

감각의 기만은 매일의 삶,

타인과의 만남 한가운데로 뻗어 있다.


불교는 여기서 서양 철학과 다른 길을 낸다.

현상 너머에 ‘진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자체가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직시한다.

꽃 한 송이는

흙과 물과 햇빛과 시간과 눈의 만남으로 잠시 나타난 형태일 뿐.

공(空)은 허무가 아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출렁이는 통찰이다.

그 출렁임을 있는 그대로 볼 때,

무언가가 풀린다.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깨어나 물었다.

나는 나비 꿈을 꾼 사람인가,

아니면 지금 사람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가.

‘현실’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지금 이 순간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심하지 않는다.

꿈속의 나비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는가.

이 결론은 너무 빠르다.

뜨거운 불꽃의 감각이 우리를 화상으로부터 지킨다.

어머니의 얼굴이 신경 패턴에 불과할지라도,

그 기억은 우리를 살게 한다.

기능하는 것은 충분히 진실하다.

완전한 진실에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프래그머티즘의 용감한 선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확실성은 삶의 형식 안에 뿌리내린다고.

바닥을 의심하며 걸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동시에 의심할 수 없다.

어떤 것들을 믿으며 사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얼마나 의식하느냐이다.


오늘날의 동굴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세계를 본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과거를 분석해,

이미 믿는 것을 확인하고 느끼는 것을 증폭시킬 것들만 골라 보여준다.

우리는 세계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편향된 표본을 본다.

이제 보이는 것 자체가 조작된다.

딥페이크는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는 상식을 뿌리부터 흔든다.

시대는 변했으나 동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려하고, 더 편안하고, 더 나가기 싫어졌다.


긴 물음의 끝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감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뇌는 추론하고 구성하고 보정한다.

언어는 미리 분류한다.

문화는 무엇을 볼지를 결정한다.

이 모든 매개를 거쳐 도달하는 것을 우리는 현실이라 부른다.

그것은 기만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더 정확히,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방식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다.

완전히 투명한 창, 해석 없는 ‘사물 자체’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탈출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창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 창에 묻은 얼룩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그 앎 위에서 더 조심스럽게 눈을 여는 것.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자신이 어떻게 보는지 모르면 무엇을 보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경고다.


자신이 동굴 안에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이미 빛을 향한 첫걸음이다.


눈을 다시 뜨자.

세계는 여전히 같다.

하늘이 파랗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발소리가 복도를 지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조금 다른 눈으로 그것을 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세계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의식하게 된, 그 의미에서.


철학은 늘 그렇게 작동했다.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것.

그리고 눈이 달라지면,

세계와 내가 맺는 관계가 달라진다.

그 관계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장소다.


감각은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그 속임을 알아챈 것도,

결국 감각을 통해서다.

이 역설을 해소하려 하지 마라.

그 안에서 살아도 된다.

우리는 그 역설 안에서 태어났고, 사랑하고, 믿으며 살아간다.

불완전한 감각으로,

완전하지 않은 진실을 향해 손을 뻗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Henri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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