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앞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가능한가

고개를 드는 일에 대하여

by Henri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늦어 있다.

새벽 네 시, 잠 못 이루던 밤. 창밖 어둠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느끼든, 시간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은 두려움보다 깊은 외로움처럼 다가왔다.


시간은 가장 공평하면서도 가장 잔인하다.

누구에게도 더 주지 않고, 누구에게서도 덜 빼앗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 앞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불가능한 손짓일까.

불꽃에게 타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꿈일까.


그러나 오래 물음 곁에 머물러 있다 보니, 질문의 모양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유는 내가 처음 상상했던 탈출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우리를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라고 불렀다.

피투성. 던져짐.

우리는 스스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 이미 흐르는 시간의 한복판에서 눈을 떴다.

앞 페이지들은 읽을 수 없고, 뒤 페이지들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 사이의 ‘지금’을 산다.


칸트는 더 냉정하게 말했다.

시간은 세계를 보는 안경이 아니라 눈 자체다.

벗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어쩌면 벗어야 할 것도 아닐 것이다.


자유를 오해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그것을 탈출로 상상하는 것이다.

늙지 않기, 죽지 않기, 어제로 돌아가기.

그러나 스피노자는 정반대 지점에서 자유를 정의했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

외부 강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행위.


에픽테토스는 노예 신분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들은 우리 안에 있고, 어떤 것들은 우리 밖에 있다. 시간은 우리 밖에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의 노예가 된다.

붙잡으려는 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했다.

과거와 미래는 결국 현재 안에서만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지금을 떠난다.

후회로 과거에 침몰하고, 불안으로 미래에 도주한다.

그렇게 오늘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오늘들이 쌓여 삶이 된다.


불교는 오래전부터 말했다.

제행무상.

모든 것은 흐른다.

흐르는 것을 붙들려할 때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흐름을 받아들이면 덧없음은 오히려 지금을 빛나게 한다.

영원하다면 우리는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니체는 가장 날것의 질문으로 답했다.

“네 삶이 지금까지와 똑같이, 단 한순간도 바꾸지 못한 채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래도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원회귀는 시험이다.

삶의 모든 흔적을 운명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가장 밝은 날도, 가장 어두운 밤도

그는 그것을 운명애(amor fati)라 불렀다.


이 수용은 체념이 아니다.

파도에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파도 속에서 헤엄치는 선택이다.

그 선택 안에 자유가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야 한다.

이런 말은 삶이 견딜 만할 때 쉽게 나온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앞에서, 무너진 사람에게 “흐름을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할 수 있다.

이 자유는 쉽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수련이고, 어떤 이에게는 끝내 닿지 않는 지평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고 해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별은 손에 잡히지 않아도 방향을 알려준다.


창밖으로 아침이 밝아온다.

시간은 이 문장을 쓰는 동안에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막을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흐름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릎 꿇지 않고, 그렇다고 싸우려 들지도 않으면서.

그저 눈을 뜨고, 온전히 서 있는 것.

지금 이 숨결, 지금 이 빛 속에.


나는 그것을 아주 작고 조용하지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것.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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