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의 침묵은 두려운가, 안식인가

아직 꺼내지 못한 말들에 관하여

by Henri

침묵에도 종류가 있다.

눈 내리는 새벽의 평화로운 침묵, 싸움 후의 긴장된 침묵, 사랑하는 이와의 편안한 침묵.

같은 소리의 부재지만, 그 무게는 다르다.

어떤 것은 충만하고, 어떤 것은 공허하다.

어떤 것은 포용하고, 어떤 것은 삼킨다.


죽음 이후의 침묵은 어느 쪽일까?

이 질문을 마주할 때, 나는 서둘러 답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은 풀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익어간다.


두려움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죽음 자체가 아닌 그 앞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는 것, 쌓아온 것들의 소실, 미완의 이야기.

하지만 이는 죽음 직전의 문제다.

어쩌면 우리는 침묵 자체가 아닌, 그 경계의 찰나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는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우리가 있는 동안 죽음은 없고, 죽음이 오면 우리는 없다.

태어나기 전의 무(無)를 고통으로 기억하지 않듯, 죽음 이후도 다르지 않다.

논증은 완벽하나, 우리의 공포는 논리 이전의 자리에서 솟는다.

자아는 자신의 끝을 상상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라고 한다.

유한성을 직시할 때 삶은 윤곽을 얻는다.

죽음의 그림자가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임종을 지켜본 후 세상이 또렷해지는 경험처럼.

그러나 그는 침묵 너머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동양 사유는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흐름으로 본다.

불교에서 '나'는 인연의 모임, 강물처럼 매 순간 변한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을 노래로 맞이했다.

그것은 변화, 봄에서 여름으로의 이행, 바다로의 귀환이다.

아름다운 비유지만, 우리는 강이 아니다.

사랑의 기억과 상실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는 존재다.

사랑은 상실을 품고, 그 슬픔이 사랑의 증거다.


카뮈는 이 어긋남을 부조리라 불렀다.

의미를 갈망하는 인간과 무관심한 우주.

시지프처럼 끝없는 반복 속에서도 행복을 상상하라.

의미가 없으면 우리가 만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죽음 이후의 침묵은 삶의 메아리다.

충분히 사랑하고, 표현하며 산 사람에게는 완결의 마침표, 안식이다.

미루고 후회한 사람에게는 미완의 악보, 공허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두렵지만 안식이기를 바란다.

다만, 꺼내지 못한 말

사랑, 감사, 미안 이 남지 않게.

그것들로 채워진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그 '무엇'은 지금 여기서 만들어진다.

아직 늦지 않은 이 하루 안에서.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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