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래를 계획하는가, 연기하는가

서랍 속의 다이어리

by Henri

가을 끝자락이면 나는 새 다이어리를 산다.

서점 한쪽에서 표지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계산대에 올리는 순간,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았는데도 결심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다이어리의 절반은 이듬해 봄이 오기 전에 서랍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서랍을 잘 열지 않는다.

열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온다.

죄책감도, 후회도 아닌, 더 조용하고 오래된 피로.

계획할 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끝내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진심이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인생에는 그런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서랍을 안고 다시 다이어리를 산다.


인간은 선택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 던져진 채,

그래도 앞을 향해 자신을 던져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으로 현재를 견딘다.

그러나 그 ‘던짐’에는 두 가지 결이 있다.

전진을 위한 움직임과, 지금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

방향은 같지만 성격은 다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경계를 흐리며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때로 실행의 언어가 아니라 회피의 형식이 된다.


나는 연기를 오랫동안 나태라고 불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가장 오래 미룬 일들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이었다는 것을.

중요하지 않은 일은 쉽게 끝난다.

정말 중요한 일 앞에서만 나는 복잡한 이유를 만들어 낸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 타이밍이 아니다.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고, 완성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이 단순한 논리가 감정의 층위에서는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나는 꽤 오래 그 논리를 받아들였다.


미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정교한 계획도 내일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기는 때로 불확실성 앞에서의 솔직한 멈춤이 된다.

문제는 그 멈춤이 끝나지 않을 때다.

나는 아직 끝내지 못한 멈춤들을 안고 있다.


시간은 끊어진 단위가 아니라 이어지는 흐름이다.

과거는 현재에 스며들고, 현재는 이미 미래를 품는다.

겨울나무는 멈춘 듯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봄을 준비한다.

나에게도 그런 적막의 시간이 있었다.

아무 계획도, 아무 실행도 없이 지나간 시기들.

돌아보면 그 안에서 나는 무언가를 삭히고 있었다.

계획도 실행도 아닌, 그저 익어가는 시간.

물론 이것이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익어감과 부패를 구별하려 애쓴다.


사람은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을 느낀다.

빈 페이지에 날짜를 적고 목표를 배열하는 순간, 이미 성취감을 맛본다.

그래서 어떤 계획은 실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지는 순간 이미 완결된다.

분명한 자기기만이지만, 그 기만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버티게 해 준다면?

내 다이어리들은 어느 쪽이었을까.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방향조차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삶은 점차 분리된다.

계획이 실제보다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나는 그 거리를 알고 있다.

나는 선택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그 사실은 자유이자 부담이다.

연기하는 상태조차 내 선택이라는 자각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피하지 않으려 한다.

나를 흔드는 질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연기는 그것을 연기로 인식하지 못할 때다.

계획이라는 외형을 유지한 채 실행에서 멀어지는 상태.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다 아무 순간도 붙잡지 못하는 것.

더 나은 상태를 기다리다 현재를 놓치는 것.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계획’이라고 불렀다.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미래를 계획하는가,

아니면 연기하는가.

아마도 나는 둘 다다.

때로는 동시에, 때로는 구분하지 못한 채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미루고, 미루는 과정 속에서 준비하며,

그 사이에서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다이어리를 산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이제 나는 서랍을 피하지 않는다.

그 안을 오래 들여다보며 묻는다.

이것은 계획이었는가, 회피였는가.

이 멈춤은 숙성이었는가, 단순한 정지였는가.

답은 늘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만큼은 달라졌다.


창밖에는 오늘도 시간이 흐른다.

계획된 것도, 미뤄진 것도 아닌 시간.

그 안에서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다.

그것으로 오늘은 충분하다.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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