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상처를 치유하는가, 둔감하게 만드는가

아물었는가, 아니면 잠든 것인가

by Henri

새벽빛 사이로 스며든 꿈.

오래전 떠난 이가 나타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눈을 뜨는 찰나, 목소리의 결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그가 거기 있었다’는 투명하고 희미한 감각뿐.

이내 그마저도 아침 공기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깊은 슬픔인지 아득한 안도인지 경계를 그을 수 없는 마음.

감각이 흐려진 것이 나아진 것일까, 아니면 소중한 조각을 영영 잃어버린 것일까.

그 구분의 지난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우리는 참으로 쉽게 말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더 이상 건넬 위로가 바닥났을 때 도망치듯 던지는 문장.

그러나 나는 그 낡은 전제를 오래 의심해 왔다.

시간은 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강물이 무심히 흐르며 스스로 둑을 쌓지 않듯, 시간 역시 제 길을 흘러갈 뿐이다.

그 무심한 폭력 같은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회복의 길을 찾고, 누군가는 차갑게 굳어진다.

그것은 결코 시간의 공이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 상처를 입던 어제의 나와 흉터를 매만지는 오늘의 나는 다른 존재다.

세포가 지고 피어나며, 기억의 단면이 마모된다.

망각은 결함이 아니라 남은 생을 앞으로 밀고 나아가기 위한 처절한 방어기제다.

형체가 바래져야만 우리는 비틀거리며 지금 이 자리에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소거되지는 않는다.

예고 없이 스치는 비 냄새 하나, 서늘한 공기의 결에 견고했던 시간의 축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과거는 유배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지금 여기로 복귀한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깊은 심연에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치유자가 아니라 무심한 보관자다.

상처를 무의식의 서랍 속으로 밀어 넣어 당장 손끝에 닿지 않게 눈속임할 뿐이다.

우리는 그 기만적인 유예를 기어이 '나아짐'이라 부르며 하루를 견딘다.


슬픔을 다루는 데에는 기나긴 노동이 수반된다.

흉터를 직시하고 이름을 붙이며 내 삶의 일부로 통합해 내는 치열한 작업.

시간이라는 강물 속에서도 직면하지 않은 고통은 결코 용해되지 않는다.

치유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한 주의(attention)의 문제다.

내 안의 어둠에 얼마나 정직하게 시선을 두는가.


고통의 농도가 옅어졌다고 해서 치유된 것은 아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재와 같은 둔감함과, 뜨겁게 타오르되 자신을 다 태우지 않는 초연함은 다르다.

시간이 방치하여 만든 둔감함은 치유가 아니다.

길고 긴 풀무질 속에서 스스로 벼려낸 초연함만이 치유의 한 형태일 수 있다.


상처는 맹목적인 아픔만을 남기지 않는다.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재편하여, 더 서늘하게 단단해지도록, 더 아프게 섬세해지도록 이끈다.

뼈아픈 상처를 통과한 사람만이 타인의 절망 앞에서 달아나지 않고 머물 수 있다.

그러므로 상처는 지워내야 할 오점이 아니라 지나온 삶의 굴곡을 증명하는 고유한 '존재의 지형도'다.


치유의 가장 깊숙한 심연은 상처가 마법처럼 증발하는 곳이 아니다.

기어코 그 상처를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자리에 있다.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늘을 좀먹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그렇게 새겨진 흉터가 있기에 비로소 '지금의 나'가 호흡하고 있음을 담담히 긍정하는 것.


시간은 결코 치유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치유한다.

시간은 다만 그 지난한 노동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무심히 내일의 아침을 데려다 줄 뿐이다.


Henri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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