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여행

어디든 갈 수 있어

by 감자부침



2박 3일간의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 포항에서 하루, 너도나도 다 가는 핫플 묵호에서 하루 이렇게 묵었다. 평소에 여행 가는 것을 매우 즐기지만, 한 번도 혼자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여러 이유로 불안한 감정도 있고, 혼자 가는 것이 과연 재미가 있을까 자꾸만 물음표를 던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시점이 되자, 혈혈단신 진정한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느낌표로 답하기로 했다.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뇌가 매우 활성화된다고 한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는 익숙한 장소, 매일 먹는 음식이 아니라, 연고도 없고 의논할 동행자도 없는 환경에 나를 노출시켜 보자는 소망 하나로 왔다.



[1일 차: 서울->포항]


사회과부도에서만 보던 포항제철의 도시에 왔다. 지평선 끝 공장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의미로. 도착 후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서, 전통시장(죽도시장)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9,000원 보리밥정식이었는데, 도저히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양이었다. 요즘 여성분들이 식당에 가면 양이 적다면서 음식을 조금만 주는 식당들이 욕을 먹는다는데, 확실히 여긴 아니었다. 경상도 특유의 튀기듯이 구운 고등어와 달래를 넣고 푹 끓인 된장찌개, 먹고 깜짝 놀랄 정도로 비린 맛이 안 나던 해초무침, 배추된장절임과 오이고추, 마지막으로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보리밥까지... 이 한 상이 9,000 원인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면 안 되지만, 자꾸만 서울 물가와 비교를 했다. '서울이었다면 이 한 상은 적어도 15,000원 이상이었을 거야..' 하면서 푸지게 먹었다. 혼밥에 도가 튼 나지만, 혼여행객으로 첫 식사를 하는 건 조금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시장 안에 있는 맛집을 찾아가다 보니 어색하기도 했다. 혼자 앉는 것이 민폐는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아갓쉬~ 뭐 드릴 까예~'라고 먼저 말을 건네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숙소에 가서 짐을 푼 뒤 구룡포로 떠났다. 숙소는 내륙 쪽에 위치해 있고, 구룡포는 동쪽끝이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약 1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나만의 여행철학이 있다면, 꼭 여행지에서 거주민들의 일상을 함께 공유해 보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교통편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돈을 아끼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정류장의 이름들을 보고 아파트 단지가 어디에 밀집되어 있는지, 학교는 얼마나 있는지, 시내와 외곽지역의 경계는 어디인지 전부 알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지리 공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항구 근처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생겼다는 이곳은, 해방 이후에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까지는 몰랐고, 나는 그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애청자로서 촬영지에 방문한 1인이었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두 주인공이 나란히 앉았던 장소에서 내가 느꼈던 그 청량함을 찾을 수 있다. 나도 똑같이 앉아서 찍고 싶었는데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카메라를 바닥에 고정시키고 겨우겨우 뒷모습만 조금 담았다. 아쉽긴 했지만 다음에는 나만의 용식이(남주인공)와 함께 와서 찍어야지 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했다. 숙소 근처에 홈플러스가 있어서, 마감세일을 기대하면서 들어갔는데 역시나였다. 광어회 1인분을 13,000원에 사서 술과 함께 혼여행의 첫날밤을 보냈다. 아 그리고, 이 날이 바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WBC 8강에 기적적으로 진출한 날이었다. 한국의 야구력이 부족하다며 조롱받고, 경우의 수 놀이를 안 하는 법이 없다며 타박을 들어도, 한 명의 국민으로서 내 나라를 응원하지 않을 수는 없다. 타자와 투수 모두 정말 고생했다. 그렇게 도파민에 절여진 채 1일 차가 저물었다.




[2일 차: 포항 영일교 방문 -> 묵호]


오후 1시 기차를 타기 전에 포항의 바다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영일대 해수욕장과 그 옆에 있는 영일교에 아침산책을 나갔다. 영일교를 건너면 해상 누각 '영일정'이 있는데, 전통 한옥 디자인이라 역사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볼거리를 늘리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을 찍은 상황에서, 해상 누각 위에서 포항의 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왕이 된 것 같았다. 둘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넘어가자.

산책을 마치고 체크아웃을 한 뒤, 숙소 뒤에 있는 해장국 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하나 깨달은 건, 포항 식당에서는 오이고추와 생양파, 쌈장을 기본반찬으로 준다는 점이다. 나는 그 세 가지를 모두 환장하면서 좋아하기 때문에 싹싹 김치 했다.

포항역은 깔끔하고 아담하다. 좁지만 푸드코트도 있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다만 주위가 허허벌판인 것이 조금 단점이다. 그렇게 마지막 포항을 눈에 담고 묵호로 떠났다.


묵호까지는 누리로 열차를 탔다. 오래된 동해선 열차인데, 사람도 별로 없고 왼쪽에는 산, 오른쪽에는 동해바다가 펼쳐져서 눈 호강을 제대로 했다. 3시간 정도 기차여행을 하고, 드디어 릴스의 성지 묵호에 도착했다. 어쩌다 이곳이 이렇게 핫플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한창때가 지나서 그런지, 3월 둘째 주라 그런 건지 한산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한섬몽돌해변'으로 갔다. 한섬해변 옆에 좁은 길을 따라가면 몽돌해변이 나온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뭉툭하지만 반질한 돌이 해변을 이룬 곳이다. 몽돌을 가져가지 말라고 cctv도 달아뒀다. 다들 돌탑을 쌓아뒀길래 나도 숟가락을 얹었다. 절에 가거나,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릴 때, 꼭 나보다는 타인을, 혹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미물을 보고도 소원을 생각하는 그 예쁜 마음을 개인한테만 쏟는 건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친구들과 우리 가정, 전쟁이 한창인 중동지역을 위해 기도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듯 세상이 굴러가기를 바라면서.

바람을 직격탄으로 맞으면서 걸어 다녔기 때문에 이러다 감기에 걸리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여행을 다녀와서 여독을 풀고 있는 지금도 아무렇지 않다.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혼자 떠난 여행이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의견조율도 필요 없고, 예기치 못한 사건도 덜 발생해서 스트레스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묵호 숙소는 여성전용 도미토리 4인실을 잡았다. 첫 도미토리여서 다른 분들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코 골면 민폐인가 하는 별별 걱정을 하면서 들어갔다. 밤늦게 여성 두 분이 오셨는데, 각자 조용히 서로의 동선을 피해서 배려의 배려를 얹어가며 지냈다. ㅋㅋㅋ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색다르고 좋았다. 무엇보다 전날에 혼자 자서 약간 무섭기도 하고 그랬는데, 얼굴은 모르지만 어쨌든 나 말고 사람이 더 있으니 맘 편히 푹잤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 아쉬워서 애정하는 아사히 맥주 한 캔과 과자를 까먹으며 새벽을 보냈다.




[3일 차: 묵호 논골담길과 하평해변 -> 컴백홈]


여행지에서는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여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꼭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3일 차는 아침부터 등산을 했다. 논골담길이라고 벽화마을이 있는데, 거기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갔다. 묵호여행의 테마는' 남들 다 가는데 나도 가본다' 였기에, 그냥 무작정 갔다. 바람의 언덕에 도착해서 정말 바람한테 수차례 얻어맞고, 묵호항의 전경과 저 멀리 끝도 안 보이는 동해를 바라봤다. 빈속에 등산은 헛구역질을 일으킨다는 걸 매콤하게 배우고, 바로 내려와서 '초당쫄면순두부'집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을 때는 1시간 넘게도 웨이팅이 있는 집인데, 이 날은 20분만 기다려서 들어갔다. 순두부가 뭐 다 똑같지 하는 냉소적인 태도로 들어갔는데, 한 번도 안 먹어본 신선한 맛있음이었다. 칼칼하고 쫄면 때문에 식감도 좋고.. 20분 정도는 거뜬히 기다려줄 수 있는 맛이었다. 다 먹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까지 2시간이 남아서 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하평해변으로 갔다.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라 해변으로 가는 길은 가로막혀 있었다. 안전상의 이유 때문인 걸 알지만, 아쉬웠다. 그래도 멀리서나마 햇볕 받은 바다를 봐서 좋았다.

소도시의 대중교통은 당연하지만 좋지 않다. 이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1시간 23분 뒤에 오는 기행을 보여주기 때문에 수도권 교통편에 익숙한 사람들은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인 즉, 나도 버스 정류장까지 내달렸다는 뜻이다. 먹었던 순두부가 올라올 뻔했지만, 아침부터 운동도 되고 좋았다.(정말?)

하평해변까지 다녀왔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독립서점에 갔다. 사지도 않을 소품을 보러 소품샵에 가는 것보다는 책을 한 권 사는 게 낫다는 주의다. 여행하는 동안 가족구성원 중 한 명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에, 그녀를 위한 시집을 샀다. 그녀는 류시화를 좋아하는 20대를 보냈지만, 먹고살기 바빠 많이 잊어버린 상태였다. 인간은 아기로 태어나 청년으로 자라 순수함을 잃은 장년이 되지만, 막상 노년으로 갈수록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되찾는 경우가 있다. 우리 집 그녀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선물을 샀다. 내가 읽고 싶은 책도 한 권 사고서, 묵호 꼬다리김밥 두 줄까지 포장한 뒤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여행 내내 영상을 많이 찍었다. 서로이웃에게만 공개하는 블로그용 영상콘텐츠를 1년 넘게 올리고 있는데, 오랜만에 이곳에 여행 브이로그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제대로 된 여독을 풀기도 전에 영상편집에 들어갔고, 6시간 만에 완성했다. 자기 효능감이 엄청난 작업이라 그만둘 수가 없다.


나의 첫 여행을 이렇게 잠갔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도록 말이다. 나의 혼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이렇게 다니다 보면, 어느 날에는 답답한 마음에 훌쩍 떠나는 즉흥도피여행이 찾아오기도 하겠지.










20260310_172912.jpg 몽돌해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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