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곰국에 소금 한 꼬집 정도

루틴 있는 삶

by 감자부침



한 차례 지나간 MBTI 열풍을 되돌아보자. 맨 마지막 자리 J와 P는 계획형과 즉흥형으로 사람을 나눈다. 나는 J이지만, 한 없이 P스러운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어떨 때 계획형이냐 하면, 인위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예민한 상황에 놓이기 직전에 그러하다. 예측 불가능한 상대를 만나서 그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싶을 때 나는 철저한 설계를 한다. 최소환승, 최소도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비상용품, 큰 가방, 여유로운 미소를 준비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 계산, 제어가능한 수준에서의 생리현상 관리 등 스스로 긴장감을 만든다. 때로는 이런 내가 좀 과한가 싶기도 하지만, 별 수 없다.


한편, 극 P의 삶을 사는 시기도 있는데, 그건 바로 극 J의 생활이 끝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될 J 생활의 1초 전까지다. 넓지 않은 생활반경, 몸이 기억하는 건강보조식품 섭취 시간, 때 되면 울리는 알람은 나를 익숙한 편안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폐쇄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을 떠올려보자.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겪어보았지만 매번 설레는 그 감정은 루틴 속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좋은 친구다. 어릴 적에는 저녁에 외식을 나간다는 말만 들어도 1교시부터 콧노래를 불렀었다.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 쉬어버린 숙주나물처럼 늘어져있다가도, 심야영화를 보자는 친구의 말에 생태눈이 된다. 꼭 가보고 싶던 식당이 조기마감을 해 다른 곳을 가도, 바로 옆 골목에서 꽤 괜찮은 맛을 찾아 나만의 맛집리스트에 추가하는 것도 인생의 별미다. 나의 눈과 뇌가 처음 인식하는 정보를 당혹스럽지만 빠르게 처리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 나는 어떤가. 떼로 피는 들꽃이 아니라 홀로 서는 나무가 되기 위한 결심에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인생 최대로 불안한 처지에 놓인 나를 보호할 막이 절실했다. 그래서 기본적인 생활 루틴을 적어놓고 지켜나가고 있다. 취침시간과 기상시간, 아침 명상타임을 확보한 뒤, 씻는 타이밍과 운동 계획까지 짜두었다. 미루고 미루던 독일어 공부도 각 잡고 하기보다는 취미로 가볍게 접근해서 완주하는 걸 목표로 했다. 감사일기 쓰기와 간식섭취 타이밍까지 꼼꼼하게 넣어두니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뿌듯은 하다. 오전의 일정과 오후의 일정이 섞이더라도 어찌 되었건 하루를 이렇게 채워보겠다는 마음이다.


루틴을 짜기로 마음을 먹게 된 건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유튜브 과학채널에서 주워들은 지식인데, 인간은 어느 정도 짜인 일상 속에서 좋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정확하게 이 워딩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계획적인 삶, 반복적이고 지루할 수 있는 그 일상이 좋다는 말이었다. 좋은 핑계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사주해석이다. 나는 나무만 3개인 갑목일주다. 불균형적으로 금(金)이 없다. 이름에 들어가니 아예 비대칭은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여보지만, AI로 해석을 보면 언제나 보완점, 취약점이 된다. 금의 성질은 쉽게 말해서 '맺음'이다. 나는 욕심이 많고 성장하고자 하는 도전적 성격이지만, 금이 없는 탓에 끝맺음을 잘 못한다.

맞다. 벌려놓고 안 한 일만 해도 수십 개는 될 것이다. 독일어 공부도 3년 전에 교재를 다 사두었지만 지금 N번째 1과 공부를 하고 있다. 정말 웃긴다. 사주는 바꿀 수 없기에,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 AI와의 심도 깊은 대화 끝에 내린 결정은 루틴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이, 나의 일벌림은 계속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통제와 결단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계획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쇠의 성질을 띤 은색 액세서리 착용, 무채색 옷 입기 등등 믿거나 말거나 조언이 난무했지만 전부 믿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하루의 알참과 성취감이 있다. 사주가 보완된다는 느낌은 모르겠지만, 해야 할 일들을 빠짐없이 한다는 점에서 효용가치가 크다. 지인들과 반나절의 외출, 나 혼자만의 여행, 대학원 준비 미팅 등 기다리고 있는 루틴 밖의 이벤트가 많다. 이것들이 극 J 삶의 아쉬움을 채워줄 것이다. 긴 연휴가 끝나면 늘 살던 대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화끈한 며칠이 당연한 평소를 권태로 바꾸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둘이 다 필요하다. 심심한 곰국에는 소금 한 꼬집이 적당한 것처럼 말이다.










KakaoTalk_20260306_125913687.jpg 지비츠를 골라 키링 DIY를 해보았다. 돈 주고 이런 거 안 사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귀여운 것들에 속수무책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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