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C Apr 24. 2022

낮술과 낮잠 사이, 상념 한 술

2022년 4월 24일 일요일, 부산 자취방에서 끄적임

몇 해 전부터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생존 방식은 '내가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는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다. 즉, 삶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삶이 아닌, 내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삶 자체에 대한 아욕을 가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성철 종정과 법정 큰 스님이 좋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좋다. 삶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닌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서 나를 일깨워가며 사회에 작은 불씨가 의도치 않게 되는 삶. 그런 삶의 방식. 


그러기 위해서는 분에 넘치는 삶을 그려서도 시작해서도 안된다. 그 분에 넘치는 삶이란 내 삶에 집착하게 되는 삶을 말한다. 타자의 눈에는 외로워 보일 수도, 슬퍼 보일 수도, 그냥 홀로 흘러가는 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타자들의 삶들이 모인 속세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이란,  그 생의 삶이란 다른 듯 하나 종국에는 이름 하나 남은 자에게 남기고 가는 허무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무의 본질도 사실은 범인의 사고와는 다를 수 있겠지마는. 주어진 삶을 오늘 하루도 살아내고, 그 삶을 살아내면서 나는 오늘도 주체적이었다. 그리고 그 삶에는 아욕은 없었다. 아쉬움이란 그 속에 없었고, 오늘 삶을 마감해도 아쉬움이란 또한 그 속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타자의 슬픔만 하나씩 지워가는 일뿐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Wheatfields, 1890,  by Vincent van Gogh]


매거진의 이전글 3화. 노동자의 편은 노동자일 것이라는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