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고독, “니들이 브런치를 알아?”

마음생태 복원기(9) : ‘침묵’의 생태학, 이런 ‘나’를 인정하기

by 성낙필

페이스북에서의 15년은 거대한 갯벌 같았습니다.


그곳엔 내가 포착한 자연의 색채와

정성껏 차린 식탁,

그리고 삶의 마디마다 돋아난

짧은 시어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저마다 환경을 말하고 생태를 전공한,

같은 방향의 숲을 꿈꾸는 이들이라 믿었습니다.


좋아요.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자위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갯벌의 들숨과 날숨처럼

뻔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농담과 꽃 사진에는

화려한 하트가 피어났지만,

시대의 아픔을 묻거나

나라의 방향을 걱정하는 문장 위엔

차갑고 무거운 침묵만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집단 침묵'이라는 이름의

고독을 보았습니다.


12년 전쯤인가요?

4대강의 비명을 외면하지 못해 생태학자로서

칼럼을 쓰던 날을 기억합니다.


학계의 배제와 업계의 냉대를 각오하고

NHK 인터뷰 앞에 섰을 때,

정작 국내 언론의 질문은 실종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혼자 서 있다는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보고 있다 믿었던 이들이

동시에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의 감각이라는 것을요.


어쩌면 저의 이런 단정이

저의 24년을

공황장애 약으로 연명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안전지대 안에서 생존을 계산합니다.


자연의 초식동물이 포식자 앞에서 숨을 죽이듯,

그들의 침묵 또한 비겁함이 아닌

하나의 생존 전략이었음을

59년 된 이제야

마음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이해해 봅니다.


옳은 편에 서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 했던 긴장감이

결국 공황이라는 이름의 불청객을

오래 붙들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억지로 여름을 붙잡지 않는

숲의 지혜를 배우며,

저는 그 소란스러운 광장을 떠나

이곳 브런치라는 작은 오솔길로

서식지를 옮겼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이곳 브런치는 조금 달라서.


체 한 달 남짓 지난 짧은 기록이었지만,

이곳엔 숫자에 취하지 않는 '깊이'가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가 휘발되는 박수였다면,

이곳에서 만난 동지들의 문장은

제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해 주는

거울 같았습니다.


말해야 할 때 함께 목소리를 내주고,

침묵해야 할 때 깊게 공명해 주는

이 서식지에 모인 개체들과의

진심 어린 연결이

제 숨을 비로소 편안하게 합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고독은 연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깊이가 부족해서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깊이는

요란한 소음보다 정갈한 침묵 속에서

맹아(萌芽)를 틔운다는 것을요.



‘맹아(萌芽)’는 새로 돋아나는 싹입니다.
숲이 불에 타도 뿌리만 살아있으면
맹아를 틔워 새로운 숲을 이루어 갑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브런치의 문을 열면서부터 오늘까지

반성문(?)만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응, 여기까지 참 잘 왔습니다."



모든 침묵을 적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

이 서식지에서,


나는 이제 숫자가 아닌

'한 사람의 숨소리'를 위해 다시 펜을 듭니다.


저 하나의 개체가 모여

다독임을 이루는 개체군이 되고.


나아가

건강한 다양성을 갖춘

군집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