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계급이 도치된 지하실, 부고니아

상징 디코딩 #010: 관념론적 노동자와 유물론적 자본가의 싸움

by 나인테일드울프

『부고니아(Bugonia)』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2025년에 선보인 한미 합작 영화다. 국내에서는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리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제작 단계에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부고니아'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 소의 사체를 집어넣고 기다리면 그 안에서 꿀벌이 탄생한다는 고대 지중해의 의식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 지중해 사람들은 죽은 고기에서 꿀벌이 자연 발생한다는 이 기괴한 주술을 굳게 믿었다.


그렇다면 썩은 사체(물질)에서 꿀벌을 잉태해 내려했던 이 고대인들의 맹목적인 '관념'은, 영화의 내용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좁은 지하실에서 충돌하는 두 주인공, 테디 게츠(제시 플레먼스)와 미셸 풀러(엠마 스톤)의 처절한 대립을 통해 풀어볼 수 있다.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념론의 극단 테디 게츠

테디 게츠는 전 지구적 음모의 배후로 미셸 풀러를 지목하고 돈을 끌어들여 납치극을 계획한다. 이때 테디는 배후를 전제하고 상황을 꿰맞추는 관념론적 사고의 나쁜 행태를 보인다.


테디 게츠가 말하는 꿀벌의 '군집 붕괴 현상'은 서식지 파괴와 살충제 때문도 아니고, 식품을 독점하려는 다국적 기업의 음모도 아니다. 더 큰 배후가 있다. 그는 공부와 관찰을 통해, 땅과 별을 샅샅이 뒤져 그것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테디가 미셸 풀러를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것은 객관적 증거나 관찰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녀가 첫 납치 대상도 아니어서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결론을 수정하지도 않았다.


테디의 이런 황당한 억측의 기제는 흔히 경험주의 혹은 유물론 철학에서는 이성주의, 관념론을 비판하는 이유가 된다. 칸트, 데카르트 등으로 대변되는 관념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전제로 하는 사고 체계이다. 마치 테디가 거대한 배후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인과를 짜 맞추듯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특정한 상을 전제한 후, 여기에 모든 현실을 대입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테디가 돈(에이단 델비스)의 화학적 거세를 단행하는 장면은 이러한 관념론적 강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생물학적 본능을 차단"하고 "욕구를 죽이면 자신의 주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육체적 욕망과 생물학적 기전(물질)을 불완전하고 타락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철저히 통제하고 억압해야만 순수한 진리(관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 기괴한 금욕주의는, 전통적인 관념 철학이 강조해 온 '이성적 인간상'의 가장 병적인 발현이다.


확실히 테디는 '타락하고 병든 관념론'의 극단을 보여 주는 인물이다. 신념과 개념이 객관적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힐 때, 그것은 폭력적인 '맹신'과 '독단'이 된다.


유물론의 극단 미셸 풀러

미셸 풀러는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규칙에 맞춰 자신을 정확하게 작동시킨다.


미셸 풀러는 알람에 맞춰 정해진 시각에 일어난 후, 피부 관리와 계획된 운동을 하고,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이른바 성공을 위해 흔히 강조하는 규칙과 체계, 자신을 정확한 틀에 맞춰 기계처럼 작동시킨다. 이런 일은 이성이나 의지에 기대는 것보단, 생물학과 심리학의 기전에 따라 마치 스위치를 누르면 반응하듯 움직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들은 이런 것들을 강조한다.


그녀가 타인, 회사 내 직원들을 통제하는 방식도 동일하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퇴근 시간을 5시 30분으로 앞당겨 가족과의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한다는 선진적인 노사 문화를 표방한다. 굳이 낡은 방식의 억압이나 강압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대신 '실적 압박'이라는 구조적 환경만 설계해 두면, 직원들이 불안감과 생존 본능이라는 심리적 기전에 의해 스스로 야근을 선택할 것임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이성이나 자발성 같은 불확실한 요소 대신, 명확한 자극과 반응으로 자신과 타인을 다루는 이 능수능란한 솜씨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녀의 높은 유물론적 이해를 나타낸다.


원작과 다른 현실성

미셸 풀러는 청년 실업가로서 사람들이 따르고 싶어 하는 모범적 인간의 면모를 드러내고, 테디도 원작의 그 알 수 없는 헬멧 대신 정장을 입는 등 훨씬 정상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구를 지켜라』의 이병구(신하균)는 확실한 정신이상 증세와 약물 의존성을 보인다. 관객은 온전히 그를 신뢰할 수 없다. 강만식(백윤식)도 대리 기사에게 치사한 갑질이나 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구시대적 사장님 캐릭터다. 원작은 여기에 더해 슬랩스틱과 만화적 연출을 섞어 '미친놈이 나쁜 놈을 고문하는' 다소 과장된 서사를 펼친다.


반면 『부고니아』는 이 보다 현실적으로 인물과 상황을 묘사한다. 테디는 단지 너무나 큰 상실감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이 모든 불행에는 어떤 거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방어기제로 인터넷 음모론에 빠져든 인물이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큐어논(QAnon) 같은 극단주의에 빠져드는 소외된 블루칼라 계층의 심리적 궤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반대편에 있는 미셸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를 보여 준다는 점에선 오히려 모범적이다. 전반적인 외양과 매너는 세련된 현대의 전문 CEO의 모습을 띠며, 항상 자신감이 넘치며 활기에 차 있다. 모든 면에서 사람들이 따르고 싶어 하는 인물로서 현실감을 지닌다.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다르게 당장 오늘 저녁 뉴스 사회면에서 볼 법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극의 현실성을 배가한다. 그래서 관객의 인물 해석은 현실에 존재하는 갈등과도 직결되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테디는 불쌍하지만 너무 끔찍하고, 미셸은 이성적이지만 너무 비인간적이다.


관념과 유물의 대립

영화는 이 식탁에서의 장면으로, 현실의 '관념에 빠진 음모론자들'과 '이들과 논쟁하는 유물론자들'의 극한 대립을 아주 압축적으로 재현한다.


역사적으로 '관념론(종교, 국가, 이데올로기)'은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유물론(마르크스주의 등)'은 억압받는 피지배 계급이 현실의 물질적 모순을 깨닫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무기였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일반적 인식을 뒤엎는 대립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류층인 미셸은 오히려 철저히 유물론적이고, 하위 계급을 대변하는 테디는 관념론적인 사고를 보인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식사 중에 일어나는 꿀벌의 '군집 붕괴 현상'에 대한 논쟁이다. 테디는 이 현상의 배후를 미리 결정해 놓고 모든 인과를 짜 맞춘다. 전형적인 관념론적 방식이다. 미셸은 정확하게 이 부분을 지적하며, 다양한 가능성(면엽 결핍, 서식지 변화, 유전적 결함 등)을 제시하고 우연히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미셸의 태도는 유물론적 사고 체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인과를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억지로 초월적인 전제를 두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사상가 루이 알튀세르는 자본주의가 출현한 원인을 규명하려 평생 애를 썼지만 그 결론은 '우연'이었다. 자본주의가 조성될 조건은 선사 이래 여러 시대에서 충족되어 왔으나,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시기에 출현한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출현한 이후의 작용과 기제는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이런 사고 체계 하에서, 미셸처럼 밝혀지지 않은 인과에 대해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할 만한 태도이다.


하지만 테디처럼 맹목적인 관념론에 빠진 사람들은 바로 이 우연성의 인정 자체를 유물론 사고의 치명적인 맹점으로 여긴다. 진화론에 대한 '미싱 링크(Missing Link)' 논란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과학의 논리에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거나 우연의 영역이 남아있으면, 그것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은폐한 배후가 있다고 맹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유물론자가 가능한 과학적 설명을 최대한 동원해도 결국 설득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미셸이 테디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데,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슨 상관이냐"라고 내뱉는 말은 바로 이 지독한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결국 영화는 이 식탁에서의 대화를 통해, 현재 진행형인 '관념에 빠진 음모론자들'과 '이들과 논쟁하는 유물론자들'의 극한 대립을 아주 압축적이고 서늘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유물론의 우세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동액을 투여하는 이해 못 할 어리석음과 함께 미셰 풀러가 발견하는 연쇄 살인의 증거들로 인해 관객은 테디에게서 완전히 멀어진다.


관념과 유물, 이 두 철학적 힘의 우위를 가르는 위험한 게임은 결국 미셸의 우세로 기울어간다. 극이 진행될수록 테디의 비합리적이고 파괴적인 면모가 통제 불능의 상태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소외당한 사촌 동생 돈이 죽음으로써 테디와 관객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동액을 투약하는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분리된다. 이어서 드러나는 연쇄 살인의 증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일말의 이해마저 완전히 거두게 만든다.


이러한 우세 속에서 관념론자 테디의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미셸 풀러가 진짜 외계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평평한 지구'를 등장시켜서, 테디가 증명한 사실마저 가장 신랄한 조롱거리도 만들어 버린다.


무려 기원전 3세기에 에라토스테네스는 단지 막대기 하나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지구의 둘레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계산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테디와 같은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론들은 2천 년 이상 뒤쳐진 낡고 낡은 병든 관념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인간의 죽음은 바로 관념의 소멸이다.


그래서 미셸 풀러는 지구는 그대로 놔둔 채 인간의 생명만 모두 소거한다. 칸트와 데카르트로 등의 철학자들로 대변되는 이른바 관념 철학은 인간 혹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 존재로 전제한다. 그녀가 수행한 일은 단지 인간에 대한 징벌일 뿐만 아니라, 관념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절대 유물론적 세계의 구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잊지 않는 경각심

유물론 우세의 구도는, 이 영화를 2002년작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게 한다. 『이퀄리브리엄』은 감정을 통제하는 맹목적인 유물론 시스템에 맞선 관념론자(인간성, 감정, 예술)들의 '낭만적 투쟁'을 다루었던 영화다. 테디와 미셸의 관계는 존 프레스턴(크리스천 베일)과 듀폰트(엥거스 맥페이든)의 대립과 등치 된다.


하지만 『부고니아』는 미셸의 손을 들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대척점의 거울을 통해 극단적인 유물론적 사고가 초래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태를 경고한다. 오늘날 뇌신경과학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관념은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과학적 발견을 우리의 실제 삶과 도덕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형이상학적 관념과 질문들을 섣부르게 차단해 버린 결과가 바로 『이퀄리브리엄』 속 삭막한 통제 사회였다.


두 영화의 대결 구도는 동일하다. 다만 전개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미셸 풀러와 그녀의 외계 종족이 지구에서 수행하려 했던 이른바 '인간 개조'는, 『이퀄리브리엄』에서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려 했던 것과 정확히 맥을 같이한다. 우주선 내부에서 보이는 외계인들의 복장 역시 흥미롭다. 블랙 코미디 장르의 특성상 다소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껍질을 벗겨내고 보면, 그것은 오직 '기능성'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그라마톤 클레릭'의 무채색 제복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 내내 드러나는 미셸 풀러의 소름 끼치는 비인간적 면모들은 바로 이러한 유물론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강렬한 우려를 표상한다.


모든 것을 물질과 기전으로 환원하는 유물론적 사관의 한계는 단지 영화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현대 유물론 철학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조차, 생애 후반부에는 차가운 과학이나 체계가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의 정동(Affect)을 설명하기 위해 예술과 영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방대한 저작(『시네마』 등)을 남기지 않았던가. 결국 이 기괴한 소동극은, 낡은 관념에 잡아먹힌 테디를 조롱하는 동시에, 인간의 영혼마저 수치화하려는 미셸의 오만한 유물론 역시 또 다른 파국일 뿐이라는 묵직한 경각심을 남긴다.


결론: 닫힌 지하실이 던지는 서늘한 질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는 단순한 SF 블랙 코미디를 넘어, 21세기 현대 사회의 병리학적 증상을 해부하는 서늘하고도 완벽한 철학적 묵시록이다. 원작이 보여주었던 체제를 향한 약자의 직관적인 분노는, 이제 어느 쪽도 쉽게 응원할 수 없는 팽팽하고 숨 막히는 딜레마로 진화했다.


현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병든 관념(음모론)'의 성으로 도피해 버린 테디,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고통마저 철저히 계산 가능한 '물질'로 환원해 버린 미셸. 좁고 습한 지하실은 이 두 극단의 괴물들이 충돌하며 공멸해 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비극적 축소판이다.



『부고니아(Bugonia, 2025)』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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