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디코딩 #002: 계급의 성채를 무너뜨린 피조물과 대중 미학의 승리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25년작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메리 셸리의 고전 명작을 자신만의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마치 움직이는 고전 명화를 보는 듯한 미장센은 감독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스크린 위에 쉴 새 없이 아름다움을 수놓는다. 특히 극 후반부에 마주하게 되는 압도적인 숭고미는, 감독이 관객을 넘어 세상의 모든 소외된 피조물에게 바치는 거대한 선물과도 같다.
델 토로 감독은 이 익숙한 비극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빚어내기 위해, 원작의 몇몇 중심인물에 과감한 설정의 변형을 가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의 변화된 궤적을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는 이 영화가 단순한 크리처물을 넘어 '계급과 자본, 그리고 구별짓기'에 관한 날카로운 사회학적 텍스트임을 깨닫게 된다.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사의 초반에 그의 어머니(미아 고스, 1인 2역)는 눈에 띄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에겐 빨간색이 늘 함께 한다. 눈에 띄는 장갑, 머플러, 덮고 자는 이불 모두 빨간색으로 그의 취향은 뚜렷하다. 영화는 빅터가 지닌 취향과 그 기원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는 특정 계급이나 환경에서 오랜 시간 길러져 무의식적으로 몸에 밴 취향과 성향, 아우라, 습관 등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이 모자(母子)를 관통하는 붉은색은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객관화된 문화자본**, 아비투스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다.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하던 카드 게임은 상류층의 전형적인 여가 문화이자 지적 유희이다. 유년 시절의 이러한 놀이는 가정 내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문화자본을 전달하는 핵심 실천 중 하나이다. 빅터는 어머니와의 이런 게임과 대화를 통해 상류층 특유의 매너와 교양, 취향을 물려받았다.
우유도 중요하다. 시대 배경 상 도시에서 안전하고 신선한 우유를 마신다는 것은, 부를 가진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이다. 보통 하층민은 돼지고기, 콩, 소시지, 감자 등 전통적이고 저렴하며 포만감이 큰 음식을 주로 먹는다. 반면에 지배 계층은 간단하고 절제된 식습관을 선호한다. 빅터의 우유는 후자에 속하며, 모계로부터 상속받은 문화자본, 귀족적 취향이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 아비투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개인이 특정한 사회적 환경이나 계급 속에서 살아오며 무의식적으로 몸에 밴 취향, 습관, 세상을 보는 태도의 총체
** 문화자본: 돈이나 부동산 같은 '경제자본'과 달리 지식, 교양, 예술적 안목, 언어 습관 등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세습하는 데 사용되는 비물질적 자산을 의미
빅터의 문화자본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행동 원리를 구성한 것은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프랑켄슈타인(찰스 댄스)이다. 어릴 적부터 전문적인 의료 지식을 전수하고, 엄격한 훈육을 통해 빅터가 가업을 잇게 하려 한다. 빅터를 체벌할 땐 "기술과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 손 대신, "얼굴은 허영"일 뿐이라며 회초리를 안면에 휘두른다. 실용과 기능성을 중시하는 상승 지향의 엘리트 계층, 지식인의 특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남작이라는 작위, 실력 있는 의사라는 설정은 원작의 '유력한 정치가이자 법관'에 비해선 오히려 신분이 낮아진 면이 있다. 그 시대엔 돈을 많이 번 평민이 주로 사들였던 작위가 남작이었고, 이발사들이 외과 처치를 하던 시절에서 크게 벗어난 시점도 아니다. 처음부터 높은 지위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보기완 다르게 사회에선 지배자의 위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가의 재산에 변동이 생기자 바로 가세가 기우는 것을 봤을 땐, 큰 부자도 아니었다. 그는 당대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 중 하나로, 상승을 지향하는 계층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통적인 상류층이 아닌 그의 문화자본은 아내에 비해 크지 않다. 그런 그의 아비투스가 드러나는 장면은 바로 첫 식사 장면이다. 이 계층은 건강에 좋은 음식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성이 높은데, 만삭인 아내에게 임산부와 태아에게 좋다며 피를 듬뿍 묻힌 빵을 억지로 먹게 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어머니의 부르주아적 문화자본과 아버지 계층의 상승 지향의 욕구가 결합된 인물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세계와 자기의 관계를 확신하며, 자신을 필연적인 존재로 여긴다.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슬픔이기도 하지만, 같은 부르주아로서 겪는 이 필연성의 붕괴이기도 하다.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말은 바로 이 존재의 당위를 회복하기 위한 선언이다. 그래서 어둠의 천사가 등장하는 계시의 꿈은 이런 자기 확신을 추인하는 잠재의식의 작용이다.
그는 자신의 징계를 심사하는 자리에서도 자신만만하고 야심에 찬 언행을 거침없이 보이며, 거만할 정도로 당당한 걸음걸이를 유지하는 등 부르주아의 에토스를 어른이 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한다. 이렇게 영화는 그 안에 도사리는 필연성과 확신을 쉼 없이 비춘다.
여기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상승 지향 욕구는 여전히 작동한다. 오를 곳이 더 이상 없는 이 관념의 신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신분 질서마저 아득히 뛰어넘는, 죽음을 붕괴시키는 신과 같은 존재, 그것이 그의 욕망이 바라보는 새로운 계급이다.
존재의 필연성과 확신에 찬 욕구, 이것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구성한다.
엘리자베스(미아 고스, 1인 2역)라는 인물이 지닌 의미는 빅터의 어머니 역과 같은 배우를 쓰는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그녀는 빅터 안의 취향과 상승 지향의 욕망을 모두 투영할 수 있는 존재다. 빅터의 어머니와 동일한 그녀의 외모는 그 시각적 증거로 작동한다.
그녀는 영화 안에서 칸트의 미학*에 부합하는 미적 태도를 주로 보여 준다.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깃털 장식,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동경과 곤충 같은 무용한 것들에 대한 순수한 미적 관심이 그렇다.
* 칸트의 관조와 순수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미학 이론. 어떤 대상을 볼 때 그것의 쓸모나 이익을 따지지 않고(무관심성), 대상이 지닌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순수하게 감상하는 태도.
하인리히 하를렌더는 이른바 벼락부자로 넘쳐나는 경제자본에 비해 문화자본은 빈약하다. 그런 그의 취미는 바로 사진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장치의 힘을 빌려 손쉽게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내려 할 때 주로 하는 실천이 사진이라고 했다.
하를렌더가 모델과 사진을 연출하는 장면은 그의 병과 운명에 대한 복선이다. 정면에서 보이지 않았던 복숭아의 베어 물은 자국은 그가 숨기고 있는 병을 은유하며, 해골이 상징하는 바는 두말할 필요 없는 죽음이다. 그리고 뇌를 파먹는 매독이란 병은 당시의 지배 계층이 급격하게 올라서고 있는 신흥 부자들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들에겐 문란한 사생활과 천박한 문화자본의 형상이 바로 매독인 것이다. 정통 부르주아들도 많이 걸렸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지만 말이다.
윌리엄은 형인 빅터와 동일한 계층에 속하지만 어머니에게 문화자본을 상속받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분명한 경제적 성취가 있지만 하인리히 하를렌더에 비해선 확실히 작다. 여러 정황상 그는 경제와 문화 양쪽에서 평균 이상의 자본을 소유한 중간 계급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중간계급 아비투스'는 고급문화를 소비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이 부족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인지 엘리자베스와 약혼한 사이지만, 그녀의 애정이 딱히 그에게만 향한 것 같지 않다. 빅터의 연구에도 주도적 역할은 없으며, 다툼에 휩쓸려 부수적 피해로 맞이하는 최후는 모두 중간의 존재가 맞닥뜨려야 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표상한다.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을 분석하는 가장 주류적이고 핵심적인 관점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이다. 이 관점에서 크리처는 무산계급이나 하층민으로 보는 해석을 따르게 되는데 영화도 동일한 궤적 위에 있다.
크리처의 육체는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하층민들의 신체 부위가 기계 부품처럼 조립된 집합체이다. 이는 산업혁명 시기, 공장의 부품처럼 취급되며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노동 계급)로 뭉쳐지던 빈곤층의 신체적 알레고리이다. 이 해석의 경로에선 크리처가 자신을 만든 빅터와 그 주변인을 파괴하는 행위는, 당시 노동자들의 폭동(러다이트 운동)이나 억압받던 민중의 폭력적인 계급투쟁의 상징으로 다뤄진다.
그리고 크리처의 문화자본은 모두 눈먼 노인에게서 온 것이다. 말과 글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학까지 그에게서 전수받았다.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그를 피지배계급으로 분류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에선 크리처가 사슬에 묶여 지내는 시점에서부터 그에게 지성이 있음을 충분히 묘사한다. 일례로 지하에 흘러든 낙엽에 흥미를 느끼고, 물에 흘려보내며 관찰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그것의 용도를 넘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흥미를 느끼는 태도는 칸트의 관조와 순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 흥미와 관찰이 후에 있을 사고에서 탈출의 경로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물론적 미학*에 가깝다. 이런 이론들은 인간의 미적 태도를 생존과 관련한 진화론과 생물학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
* 유물론적 미학: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나 예술적 태도를 순수한 정신적 작용으로만 보는 대신, 생존 본능이나 진화론, 혹은 사회의 물질적·경제적 조건 등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파악하려는 관점
엘리자베스는 처음에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숭고한 이상들"을 위해 전쟁터의 "진흙에 얼굴을 처박고 피를 토하고 고통에 울부지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확하게 크리처는 그자들의 시신을 자르고 꿰어 붙여서 만들어진 존재다. 크리처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의 시선이 거기로 향해 있었다.
크리처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미적 태도는 부르디외의 계급 미학만으론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층민에 대한 지배계급의 미적 관심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것은 보통 그마저도 소화하는 자신의 문화적 세련됨을 과시하는 용도이다. 하지만 크리처에게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그녀의 태도는 이런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이 설명 불가능한 태도를 지닌 그녀는 이 영화가 지닌 의미의 핵심이다.
빅터는 크리처가 깨어난 이후 자신에게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과 크리처를 혹사하는 것, 그리고 우격다짐뿐이었다. 그의 자신에 대한 필연성과 확신은 구체적 계획이 없이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으로만 쌓은 허위이자 허세였다. 엘리자베스는 첫 만남에서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성대의 진동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엘리자베스는 크리처가 금방 자신의 이름을 따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크리처가 눈먼 노인을 통해 말과 글을 쉽게 깨우치는 것을 보면, 빅터의 학습 방법이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영화는 노인이 손녀에게 말을 가르치는 구체적 학습 방법까지 묘사해서 빅터의 오류를 확증한다.
빅터에게 크리처는 처음에 경이로운 존재였다. 세상에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할 증거로서 그렇다. 하지만 크리처의 지성은 그가 원하는 수준까지 금방 갖춰지지 않는다. '빅터'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크리처에게 결국 실망한다. 크리처는 어머니 미학, 아버지의 지성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였다.
흥미롭게도 엘리자베스가 방문한 시점에서 빅터의 크리처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더 심해진다. 1:1의 관계에선 거리를 유지했지만, 엘리자베스와 삼각의 관계가 형성되자 그 거리를 더욱 벌린다. 이런 전개는 결국 계급 내에서 천연적이라 생각하는 그 기준들이 사실은 계급 간의 상대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소쉬르적 차이*라는 부르디외의 설명과 일치한다. 빅터는 엘리자베스가 상징하는 부르주아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크리처의 지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논리를 펼치고, 존재의 사멸을 결정한다.
* 소쉬르적 차이: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이론에서 차용한 개념. 어떤 대상의 가치는 그것 자체의 절대적인 특성이 아니라, 오직 다른 대상과의 '다름(차이)'을 통해서만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 (예: 지배 계층의 취향은 그 자체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층민의 취향과 '다르기 때문에' 고급으로 취급됨)
이렇듯 이 서사는 마르크스적 관점과 부르디외의 계급 미학을 촘촘히 엮어내며 인물과 사건을 규정하고 있다. 크리처는 늑대의 습격을 통해 "어떤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사냥당하고 죽임 당할 수" 있다는, 계급투쟁 본연의 작동원리까지 깨닫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대중 예술을 지향하는 영화를 통해 펼쳐질 때 결말은 180도 달라진다. 영화가 원작의 설정을 변경한 부분 중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이 바로 엘리자베스이다. 이 존재가 죽음과 함께 그 의의를 드러낼 때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의미를 분출하기 시작한다.
지배 계급의 취향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층민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단순히 미를 탐닉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영화 내에서 '부르주아적 미'의 상징이다. 그런 그녀의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덧없다", "이름 모를 무언가를 갈망했다"라는 말은 '의인화된 아름다움'이 껍데기뿐인 관념의 실체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계급적 허세와 통제욕(빅터)의 시선 아래서는 덧없이 부서질 수밖에 없던 미가, 어떠한 선입견이나 자본의 렌즈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크리처(민중)의 순수한 시선을 만났을 때 비로소 영원성을 획득한다. '미의 관념'이 민중의 시선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으로의 도약'이다.
크리처의 눈은 카메라, 순간의 아름다움(엘리자베스)을 시선으로 붙들고 영원에 가둔다. 이게 영화다. 이 장면은 곧 역사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민중 계급이 마침내 영화라는 대중 예술을 통해 '미와 숭고'를 온전히 획득하고 성취해 냈음을 상징하는 가슴 벅찬 은유다.
과거엔 '순수 미학'과 '숭고'는 엘리자베스의 수녀원이나 빅터의 저택처럼 한정된 부르주아 계급만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영화는 태생부터가 철저히 대중(민중)을 위한 예술이며, 감상과 소장에 있어서 자본의 장벽이 높지 않다.
괴물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평생의 작업으로 삼아 온 델 토로 감독은, 아름다움(엘리자베스)을 독점하려던 귀족적 이성의 실패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이름조차 없던 기괴한 피조물, 즉 '대중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보냄으로써 영화라는 대중 예술이 가진 진정한 미학적 승리와 숭고함을 이 서사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 모든 계급적 허상과 구별 짓기의 비극은, 세상의 끝인 북극의 빙원에 이르러서야 장엄한 종말을 맞이한다. 빅터는 크리처를 마침내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가 가진 모든 경제적, 문화적 자본이 자연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리처와 동등한 인간 대 인간(부자)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문화사적 성취 중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이것이다. 크리처, 그를 이젠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를 수 있다. 그는 프랑켄슈타인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이며, 불멸의 가주이다.
마지막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계급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전시되던 부르주아의 가짜 아름다움을 모두 소거한 뒤, 세상의 가장 끝자락에서 이 불멸의 가주, 영화의 주인인 대중(민중)에게 '절대적 숭고미'를 선사한다.
북극의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
어떤 자본의 렌즈도 거치지 않고, 오직 존재와 대자연의 숭고함을 직시하며 맞이하는 이 마지막 순간은, 델 토로가 영화라는 대중 예술을 통해 세상 모든 소외된 피조물들에게 바치는 가장 장엄하고 눈부신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