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미(美)를 포착하는 그물의 씨줄과 날줄

미학 디코딩 #001: 한 시각 장애인의 예술에 작용하는 관념과 유물

by 나인테일드울프

연상호 감독의 영화 『얼굴(2025)』는 시각장애를 지닌 전각 장인 아버지(권해효)와 그의 아들(박정민)이 40년 전 실종된 어머니의 백골 사체를 발견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이다.


2억 원의 독립영화 수준 제작비로 제작되었으나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로 화제가 됐었다. 묵직한 서사를 통해 진실을 마주하는 태도와, 마지막에 내리는 결정을 통한 씁쓸한 주제 의식에는 연상호 감독 특유의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영화에 안에서 시각 장애인이자 명인인 임영규가 만드는 도장의 아름다움, 장영희라는 한 여인의 추함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미(美)와 추(醜)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해석하기 위해 미학 이론이 필요할 것 같다.


시작해 보자.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관조의 씨줄

임영규만의 독특한 스타일에 관객도 아름다움을 느낄 때, 이것이 단순히 주관적 판단이 아님을 영화는 각종 상패와 신문 기사로 설명한다.


영화는 임영규라는 인물이 아름다움을 깨닫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며, 자신이 미(美)를 지각할 수 있음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보여주는 인재(印材)를 깎는 기술은 능숙하다. 파내려 감에 거침이 없다. 완성 후 인장의 흔적에선 장인의 품격마저 느껴진다.


이 미적 판단이 관객의 주관적 느낌만은 아니다. 각종 표창과 공로패, 신문기사는 그가 시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경지에 오른 명인이라는 사실을 부각한다. 영화 내에서 그의 도장은 단지 실용 도구가 아닌 하나의 공예품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과거와 다르게 오늘날의 도장은 실용성이 거의 사라진 도구이다. 각종 계약은 전자 문서로 진행하며, 종이 서류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지금은 서명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이 도장에 보이는 관심은 이젠 순수한 취미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임영규의 도장이 사회적으로 우대받는 상황은 관념론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에 부합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판단력 비판』에서 대상이 어떤 실용적인 쓸모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그 형태 자체가 완벽한 질서와 완성도를 갖춘 것처럼 보일 때 아름답게 느낀다고 말한다. 순수한 관조는 실용적, 도덕적, 성적 욕망이나 소유욕을 배제한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식 능력(상상력, 오성)의 작용이다.


칸트는 이것을 모든 인간이 지닌 일반 능력으로 보았다. 요즘 시대의 말로 하면 인간 공통의 운영체제(OS)인 셈이다. 시각 장애인이 손 끝의 감각만으로 만들어낸 작품이 시각의 만족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이 OS의 작동은 더 분명해 보인다. 감독은 이 타고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능력의 가능성을 영화 전반에 씨줄로 드리우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물에 걸린 추(醜)

타인 앞에서 누군가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멸시한다는 건, 그 권력관계를 누구나 동의할만한 천연의 것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느낄 주된 관심 중 하나는 바로 정영희의 외모다. 영규의 인장과는 다르게 영화는 정영희의 외모를 결말 직전까지 꽁꽁 숨겨 놓는다. 그 어떠한 객관적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의 증언으로만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모두의 증언은 같다. '심각하게 못생겼다.'


영화 내 증언들을 관념 철학에 기대어 해석하면, 정영희의 외모는 보편 인식의 기준에서 미의 기준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관객들은 이 추함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마음은 불편하다. 누군가를 추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 우리가 가진 보편 윤리를 분명하게 위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인식능력으로 감별한 못생김인데 어째서 그럴까?


칸트는 실천 이성을 동원하여 자유미*의존미**와 같은 복잡한 개념으로 이런 불편함을 설명한다. 하지만 복잡한 개념을 겨우 이해해도, 실상에 적용하기엔 기준이 모호하다. 이 부분이 니체와 부르디외 같은 후대 철학자, 사회학자들이 칸트의 미학을 비판하는 이유다. 그들은 복잡한 개념 대신 사회의 합의, 시대와 계급의 편견, 그리고 권력과 욕망으로 미와 추의 분리를 설명한다.


영화는 칸트 미학을 증명하는 척하다가, 정영희라는 존재를 통해 이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 자유미(Free Beauty): 대상의 개념이나 용도와 무관하게 느끼는 순수한 아름다움.

** 의존미(Dependent Beauty): 대상의 목적이나 기능에 적합한지를 고려하는 아름다움.


편견의 날줄

영화는 정영희의 얼굴을 철저하게 감추면서,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관객의 눈은 이 영화에선 무용지물이다. 정영희의 외모를 모두 다른 사람의 말로 추측한다는 점에서 시각 장애를 지닌 임영규와 같다. 단지 듣는 말과 인식의 결과만 다르다. 관객에겐 하나의 궁금증이 남는다. '도대체 얼마나 못생겼을까?'


이 관음증의 욕구를 대변하는 이가 바로 방송국의 김수진 PD이다. 무언가 큰 사건이 있다는 직감, 정영희 사건의 추적이 더 재밌을 것이라는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의 호기심과 같다. 그래서 증언자들을 향한 그녀와 관객의 시선은 일치한다.


그리고 이 시선은 영화 내에서 정영희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공통된 특성을 포착한다. 피복 공장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멸시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똥걸레라는 멸칭을 입에 담으면서도 인간적 부끄러움 같은 건 전혀 느끼질 못한다. 사람을 규격 외 물건 취급하는 이들의 태도는 보는 이들에게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정영희가 못생겨서 천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똥걸레라 부르다 보니 그녀가 추해진 것인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관점을 빌리자면 단연 후자다. 부르디외에게 미적 판단이란 타인과 나를 분리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철저한 사회적 '구별 짓기(Distinction)'의 도구다. 공장 직원들의 행위는, 재봉사 혹은 재단사라는 자신들의 지위가 '시다'보다 낫다는 알량한 권력의 확인이다. 즉, 정영희 얼굴의 추함은 칸트의 타고난 인식 능력이 아닌, 공장의 위계를 공고히 하는 사회적 분류의 결과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정확히 포착한다. 그리고 관객은 이 피복 공장이 단순한 영화의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축소판임을 깨닫는다.


욕망의 날줄

부르디외는 사진을 '중간 예술'이라 칭했다. 이는 고급 예술의 문턱을 넘지 않고도, 일상을 예술적 안목으로 재구성하여 문화적 자부심을 획득하려는 계층의 전략적 선택이다.


부르디외의 저서 『구별짓기』에는 이 영화와 관련성이 높은 흥미로운 설문조사의 결과가 하나 있다. 설문은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대상 혹은 사회적으로 미와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대상들에 대해 '사진으로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응답에선 이른바 학력과 신분, 재력이 높은 계층일수록 이 가능성을 높게 인정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문화자본이 풍부할수록 대상을 사회적 편견에서 분리해 오직 미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권력, 부르디외는 이를 '미적 태도'라 불렀다.


영화에서는 이 권력을 지닌 자로 백주상이 등장한다. 그는 피복공장의 경영자로, 부르디외가 말하는 중간 계급의 '쁘띠 부르주아' 계층에 속한다. 카메라는 그의 경제자본이 문화자본으로 전환된 사례이다. 부르디외가 쁘띠 부르주아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 실천으로 꼽은 것이 바로 사진이다. 백주상은 이 이론의 판박이 같은 존재다.


그의 사진 취미는 자신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원들, 주변의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노동과 삶의 고단함을 분리해 아름다움만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는 부르디외가 말하는 미적 태도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는 카메라 앞의 사람들에게 웃으라고 하고, 웃으니까 예쁘다고 말한다. 그의 아름다움은 웃음이라는 틀에 들어맞을 때 포착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사람 좋은 신사, 평범한 사진 애호가인 그에겐 비밀이 있다. 공장 여직원들을 성폭행하고, 그 나체를 사진으로 남겨서 즐기는 어두운 욕망이 그것이다. 영화는 백주상-쁘띠 부르주아의 관조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그 기저에는 욕망이 깔려있다는 것을 이진숙과 정영희의 사건을 통해 까발린다.


정영희가 다시 드리우는 씨줄

당장에 별다른 쓸모가 없는 도장이지만, 정영희는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흡족해한다. 영화가 순수한 관조에 의한 자유미(美)를 구현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영화는 칸트의 순수한 관조를 부르디외적 시각에서 부정하는 듯하다가 다시 한번 반전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정영희는 임영규가 처음 파준 도장을 보고 예쁘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도장은 현대인의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무용지물이지만 예쁘다. 이로써 모든 사회적 욕망과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자의 순수한 관조가 영화 한가운데서 기적처럼 구현된다.


그리고 정영희는 정확하게 칸트의 관념론을 대변하듯, 이 순수한 관조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 이성을 작동시킨다. 자유미를 지각하는 순수한 이성은 필연적으로 윤리의 법칙에 반응해야 한다. 기능공을 단지 성별 때문에 성적 도구이자 사진의 피사체(수단)로만 전락시키려는 백주상의 폭력에 대한 그녀의 대항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숭고한 구현이다. 이렇게 영화는 또 하나의 씨줄을 드리운다.


영화가 만들어 놓은 그물

물론 정영희의 미적 자각을 오직 칸트적 관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진화의 관점에서 분석한 '리트로넬로*'나, 로돌프 이나스의 뇌신경과학이 말하는 '고정행동패턴(FAP)**'과 같은 유물론의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원리의 하층부로 파고들어 닿게 되면, 진화와 생존이 뇌에 새겨놓은 그 선험적 패턴이 결국 칸트가 말한 보편적 '오성***(지성)'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런 질문을 의식한 듯, 씨줄과 날줄로 두 철학의 미학을 마치 그물처럼 엮어 놓는다. 딱히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양상을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 리트로넬로(Ritornello): 본래 음악의 '되풀이 문구'를 뜻하나, 질 들뢰즈는 이를 생명체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고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기 위해 반복하는 리듬이나 패턴으로 정의했다. 극 중 정영희의 미적 감각을 생존에 유리한 형식을 본능적으로 감별하는 생명체 특유의 '리듬적 반응'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 고정행동패턴(FAP): 뇌신경과학자 로돌프 이나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특정 자극에 대해 유전적으로 각인된 자동적·정형화된 행동 체계를 의미한다. 정영희의 미적 판단이 후천적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뇌 신경망에 선험적으로 새겨진 본능적 반응임을 설명하는 유물론적 장치다.

*** 오성(悟性): 감각 정보를 개념으로 통합하여 파악하는 지적 능력이다.


상인 줄 알았지만 여전했던 멸시

임영규가 느끼는 정영희의 아름다움은 타인의 시각에 의존한다. 주변 사람들이 예쁘다 말할 때는 상으로 여기다가, 친구의 말에 자신에 대한 멸시와 기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영희 살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영화의 함의는 부르디외의 사회학 개념으로 다시 넘어온다.


임영규에게도 손끝의 촉각만으로 타인의 시각을 만족시키는 순수 미감의 판단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평생 받아 온 멸시를 떨쳐내려는 사회적 인정 욕구를 풀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이 생존 본능과 욕구로 인해 순수해 보이던 그는 이미 타인의 계급적 욕망(아비투스)에 찌든 타율적 인간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는 영희를 일종의 트로피 혹은 상패처럼 여긴다. 사람을 도구화한다는 관점에선 칸트가 말하는 의존미의 지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백주상으로 대표되는 인물들과 정영희의 갈등이 마뜩잖다. 사람들에게 내세울 전리품으로서의 그녀가 오히려 그들과 멀어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 규칠의 말은 그 자랑거리의 가치마저 없애 버린다. 상(賞)이자 전리품인 줄 알았던 것이 사회의 멈추지 않는 멸시였음을 깨달은 영규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범죄를 저지른다. 우발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죽음의 고의성은 행위보다 관념에 있다.


부르디외는 계급 간의 거대한 분절뿐만 아니라, 동일 계급 내부에서도 자본의 소유량, 상승과 하강에 따라 미세한 위계가 나뉘며 끊임없는 '계급 내 투쟁'이 벌어짐을 역설했다. 임영규가 저지른 살인은 계급 상승의 좌절이 불러온 내부 응징이자, 하층민 내부에서도 작동하는 지독한 권력 의지의 발현이다. 지배 계급의 착취 구조가 피지배 계급 내부에서 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서로를 베는 이 광경은, 계급투쟁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촘촘하고 질식할 듯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임영규는 타인의 시선으로 정영희의 외모뿐만 아니라 그 피지배적 위치까지 평가하였고, 자신과 구별 짓기 위해 가장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경제, 문화자본 모두 빈약한 그가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수단은 육체의 힘뿐이었던 것이다. 살해는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지만, 이 힘의 투사는 분명했다.


은신하던 피지배분파

정영희의 외모에 대한 궁금증은 이 사진 한 장으로 모두 풀린다. 끔찍한 멸시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외모는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이다.


영화는 사회학 관점에서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착취와 억압이 '예술'이라는 해방의 도구에도 똑같이 존재함을 풀어낸다. 그것도 가장 하위 계급에 속한 시각 장애인과 그 아내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파내어, 이 기제가 학술적 계층 구분보다 훨씬 촘촘한 간격으로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마치 숨 쉴 구멍을 다 틀어막은 듯한 질식감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끝에서 영화는 다시 한번 반전을 일으킨다. 김수진 PD가 백주상으로부터 받아 낸 사진 속 정영희는, 그토록 끔찍한 멸시를 당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영화는 이 못생김에 대한 평가가 철저히 계급 인식의 반영이었고, 그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폭력적 욕망의 분출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욕망의 상징이었던 백주상이 정영희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남긴다는 아이러니를 통해 다시 한번 관조의 씨줄을 영화에 드리운다. 그는 그녀를 자신이 지닌 어두운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개연성 측면에선 김수진 PD가 동환의 덮어달라는 요청을 수락하는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다. 촬영본이 손상됐다 해도, 피복 공장 직원들과 백주상을 다시 만나 증언을 얻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가의 명인이 저지른 살인을 폭로할 수 있는 거대한 특종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저널리스트라니, 그 동기가 불분명하다.


김수진 PD는 특종이라는 기자적 본능보다, 임영규가 일궈낸 '명인'이라는 예술적 아우라를 깨뜨렸을 때 닥칠 문화적 손실에 더 큰 압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진실보다 '아름다운 신화'를 보존하려는 이 기묘한 선택은, 사실 그녀가 속한 지식인 집단(피지배 분파)의 전형적인 미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김수진 PD 자체는 한 개인일 뿐이지만, 그녀가 속한 방송국은 예술 제작과 담론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피지배 분파'에 속하거나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이다.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들은 문화 자본을 보유한 채 상층 계급의 하부를 이루는 지식인 집단이다. 따라서 그녀의 묵과는 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임영규 도장의 아름다움을 오직 그 '순수한 형식'으로만 보존하고 판단하려는 지배 계급 특유의 폭력적인 미학적 태도가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결론: 동환이 덮어버린 것

사회의 상위층이라고 해서 항상 정통 문화만 향유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가끔 하위문화에도 미친다. 이때 지배계급의 하위문화에 대한 평가는 '예술적 대상'으로의 재해석 과정을 거치며, 이때 하위 계급이 즐기는 실용성이나 감각적 즐거움과는 거리를 둔다. 이들에겐 하위문화조차 '판단하고 분류할 수 있는 자신들의 우월한 안목'을 과시하는 수단이며, 여기에는 원래 향유자의 미적 판단력은 배제된다.


그리고 이것은 정영희가 보여준 순수한 관조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과 정확하게 같다.


영화는 동환의 울음으로 긴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후회와 자책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없지 않지만, 정영희의 순수한 관조를 덮어버린 것에 대한 책망과 분노보단 크지 않다.



『얼굴(2025)』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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