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디코딩 #011: 김영하와 프로이트로 읽는 죽음의 미학
『헤어질 결심(2022)』은 박찬욱 감독의 11번째이자,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장면 영화이다. 이 영화는 형사인 장해준(박해일)이 사건의 피의자로 만난 송서래(탕웨이)에게 느끼는 관심으로 시작해서, 둘의 사랑과 살인의 진실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어머니의 안락사를 도운 것을 제외한다면, 서래는 모두 두 번의 살인을 하고 세 명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일이 그녀의 관찰과 기획, 연출에 의해 한 치의 오차 없이 발생한다는 것은 놀랍다. 이런 그녀를 바라보면 마치 소설가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자살을 연출하는 인물이 떠오른다.
소설과 영화, 각기 다른 형태의 이 두 작품의 비교를 시작으로,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가 해변에 파묻은 진실을 다시 파헤쳐 보자.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영하가 1996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하며 선보인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파격적인 인물, '자살 카운슬러'가 등장한다. 그는 현대 도시를 차갑게 관찰하며, 삶의 에너지를 잃고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세연, 미미)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아내어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마치 영혼을 거두러 다니는 '현대판 저승사자'와도 같은 이 화자는, 기존 평단에서 '죽음 자체를 의인화'한 존재로 읽혀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등장하는 '서래'와 앞선 소설의 화자 '나'를 관통하는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타인의 '죽음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서래는 간호사로서 병든 어머니의 안락사를 도왔고, 첫 남편 기도수를 산에서 밀어 추락사시킨 뒤 이를 자살로 정교하게 위장했다. 또한 당뇨병으로 고통받는 사철성의 어머니에게 편안한 죽음을 제공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의 살해를 이끌어내는 등 모든 죽음은 그녀의 철저한 계획과 연출대로 흐른다.
치정과 살인, 로맨스라는 매혹적인 외피를 두른 이 영화의 진짜 의미는, 김영하 소설 속 '죽음의 대리인'과 서래의 교집합을 발견하는 데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래는 앞선 소설의 자살 카운슬러가 그렇듯이 삶을 관찰하며 자신의 작용을 기다리는 죽음과 같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서래가 텔레비전을 통해 영상을 응시하는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해준과 대면한 직후로, 사극 속 무녀가 죽어가는 장면을 보며 유명한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대사를 되뇌는 씬이다. 두 번째는 해준과 결별 후,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이포로 향하기 전이다. 화면 속에선 원자력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여자가 등장하고, 서래는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한다.
이는 김영하 소설의 화자 '나'가 세 점의 명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과 정확히 조응한다. '나'는 그림 속에 묘사된 죽은 자와 살인자의 표정, 심리, 정황을 서늘하게 해체하는데, 이는 마치 사신(死神)이 자신을 맞닥뜨린 인간들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관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매체를 대하는 두 인물의 이 같은 태도를 비교해 보면, 자신의 도래에 반응하는 인간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의 은유를 뚜렷하게 읽어낼 수 있다. 죽음은 늘 삶과 함께 하며, 스크린과 캔버스라는 액자 너머에서 언제나 우리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는 죽음의 미학이 두 작품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장해준은 강력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다. 영화 속 그가 맡은 주요 사건은 모두 살인 사건이다. 아내 안정안(이정현)은 이포로 발령받은 후 시들어 가는 그를 보며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라고 꼬집고, 심지어 조용한 동네에 마침내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축하한다"라고 말할 정도다. 직업적 특성을 넘어, 그는 본질적으로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고 쫓아야만 생기를 얻는 인물이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말처럼, 해준이 죽음을 쫓고 깊숙이 들여다볼 때 죽음 역시 그를 마주 본다. 용의자 이지구를 추격하는 해준을 뒤쫓는 서래의 시선을 보라. 참고인 혹은 피의자가 형사에게 품기에는 너무나 예외적인 관심이다. 이는 곧 '죽음' 자체가 그에게 매혹되어 호기심을 느끼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영화는 해준을 응시하는 이 서늘한 죽음의 시선을 세 차례에 걸쳐 스크린에 잡아낸다.
첫째, 영화 초반 카메라는 이미 죽은 기도수의 탁한 시선을 빌려 암벽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해준을 올려다본다. 둘째, 홍산오가 투신해 죽었을 때도 옥상에 선 해준을 향해 초점을 잃은 주검의 눈동자가 똑바로 향해 있다. 마지막으로 해준은 물 빠진 수영장 벽에 기댄 채 죽어 있는 임호신의 텅 빈 시선에도 꼼짝없이 붙들리고 만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키릴로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이 신과 같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이렇듯 누구나 무병장수와 영원한 삶을 바라는 평범한 일상을 떠나 예술의 세계로 진입하면, 역설적으로 죽음을 갈망하고 탐구하는 미학이 빈번하게 펼쳐진다. 어째서 그럴까?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쾌락 원칙을 넘어서』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린 죽음에 대한 동경을 규명한다. 생명체에게 변화란 근본적으로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긴장과 갈등이 없던 이전의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가려는 강박적인 '회귀 본능'이 존재한다. 이 개념을 논리의 극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발현된 생명체가 아예 고통조차 없는 '무기물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근원적인 본능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본능(Thanatos, 타나토스)'이며, 그 대척점에 성애와 생명의 본능인 '에로스(Eros)'가 자리한다.
초기의 프로이트는 성적 추동인 리비도(Libido) 중심의 에로스만을 주로 이야기해 왔지만, 이 시점부터는 파괴와 생명의 본능 양쪽이 끊임없이 길항하고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이른바 본능의 융합(이중 본능 이론)으로 정신분석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겉으로는 살인 사건을 둘러싼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만, 실상은 생명을 갈구하는 에로스와 무기물로 회귀하려는 타나토스의 융합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인간 본능을 무대로 올려두고 있다.
해준은 후배 형사 수완이나 연수와 달리 늘 말끔한 차림새를 유지한다. 험한 사건 현장을 누비고 범인을 쫓아 달릴 때도 그의 넥타이는 단정하게 매여 있다. 담배를 끊고 요리도 곧잘 하며, 아내 정안의 건강을 위해 석류를 챙기고 따뜻한 가정식을 차려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는 서래가 끼니를 때우는 차가운 아이스크림 대신 자신만의 중국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죽음에게 조차 자신의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나누는 모습이다. 여러모로 그는 삶과 생명의 흐름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며, 정안과 서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다분히 '에로스(삶과 사랑의 본능)'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에로스에 충실해 보이는 이 남자를 영화 내내 괴롭히는 치명적인 결핍이 있으니, 바로 지독한 불면증이다. 잠이란 살면서 매일같이 짧은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비밀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그에게는 정작 '일상적인 죽음(잠)'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일상적 죽음에 대한 지독한 갈증을 품고 있던 해준이, 죽음을 주관하는 자(타나토스)를 맞닥뜨렸을 때 맹렬하게 끌리는 것은 필연이다. 그가 잠복수사라는 명목으로 서래를 관찰하며 비로소 모처럼 만의 달콤한 숙면에 빠져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래가 불면에 시달리는 해준을 재우는 방식은 서로의 '호흡을 맞추는 일'이다. 타나토스(죽음)에게는 본래 호흡이 없다. 그러므로 죽음과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곧 숨을 멈추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서래가 가진 권능이다.
해준의 가쁜 숨결이 그녀의 서늘한 숨결과 동기화될 때, 그는 비로소 삶 속에서 완전한 죽음을 겪는 깊은 숙면에 빠져든다. 서래와 헤어지고 이포로 떠난 해준이 다시금 끔찍한 불면에 시달리며 시들어가는 이유는, 생의 본능(에로스) 하나만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었던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처럼 그의 삶이 불완전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생명만을 탐해서는 온전해질 수 없다. 우리의 무의식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는 늘 죽음의 본능이 함께 흐른다. 예술이 끊임없이 죽음의 미학을 펼쳐내고, 이 영화 속 사신(死神)이 그토록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자태로 도래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생명만큼이나, 우리는 어떻게든 충족시켜야만 하는 어둡고 파괴적인 욕구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서래는 해준이 현대인치고 품위가 있다고 말하고, 그는 그녀에게 대체 어느 시대에서 왔느냐며 응수한다. 이는 곧 불멸하는 죽음(타나토스)과 찰나의 생명(에로스)이 마주한 순간, 마침내 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아보고야 마는 매혹적인 교감이다.
이들이 스마트폰, 스마트워치의 번역기와 녹음된 음성을 매개로 소통하는 방식을 보자. 본질적으로 죽음과 생명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실시간으로 온전히 교감하지 못하고, 기기를 거친 '지연된 소통'과 '통역'을 통해서만 겨우 서로의 진의를 읽는다. 우리의 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파괴와 사랑의 추동은 그 즉시 뚜렷하게 자각되지 않으며, 마치 스마트기기에 저장된 음성 파일처럼 훗날 기억을 꺼내어 집요하게 곱씹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송서래를 '죽음의 의인화'로 읽을 때, '고소공포증'이라는 묘한 특성이 그녀를 따라다닌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현기증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 밑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공허, 즉 추락하고 싶은 욕망에 대한 방어 기제라고 말했다. 죽음의 화신인 서래는 어쩌면 그 아찔하게 높은 곳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반대 극, 생명의 저항에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첫 남편 기도수를 살해하는 일은 자신의 힘만으로 겨우 감행했지만, 훗날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는 산분(散粉)의 의식은 결국 해준의 도움을 받는다. 그 아득한 낭떠러지 근처에는 가지도 못한 채, 먼발치에 서서 망자와 작별을 고하는 그녀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애처롭다.
생명이 죽음의 의식을 돕는 이 숭고한 풍경. 결국 망자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일은 산 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이는 죽음 스스로는 결코 완수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이중 본능, 즉 파괴와 생명의 매혹적인 교합은 이 영화 속 호미산 정상에서 이토록 시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이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그 완전한 의미는 바다의 깊은 심연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어 결코 온전히 건져 올릴 수 없다. 인간이 무의식 중에 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동경 역시 마찬가지다. 서래가 들었다는 해준의 '사랑의 말'도, 실제로 뱉은 말의 겹겹이 쌓인 이면을 파고들어야만 비로소 그 진의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우리 내면의 죽음 본능은 깊고 은밀하다.
그래서 서래는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된 채 바다 밑으로 사라진다. 스마트폰을 깊은 바다에 빠뜨려 아무도 못 찾게 하라는 해준의 절박한 당부는, 역설적이게도 그녀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심연에 유기하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실현된다. 우리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이 어두운 욕망은, 빛의 예술(영화)을 통해 잠시 그 황홀한 자태를 드러냈다 하더라도 결국 다시 은막의 뒤편으로 스러져야만 하는 운명이다.
그 운명에 따라 스크린 위를 부유하던 그들의 '마침내'는 바로 이 정해진 수순을 위해 서래의 해변에 내려앉는다.
마지막 씬, 위태로운 손전등 빛에 의지한 채 서래를 찾으러 짙은 안개 낀 바다를 헤매는 장해준의 모습은 곧 죽음의 미학을 탐구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초상과 겹쳐진다. 그들이 심연을 향해 빛을 비추며 갈망하는 한, 김영하와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박찬욱이 그러했듯 이 아름답고 처절한 사신(死神)은 언젠가 또 다른 예술가의 손끝에서 기꺼이 다시 현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