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 디코딩 #013: 거대한 무의식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
현대 기호학-문화연구에 있어서 '텍스트(Text)'는 단지 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의미를 담고 있어 해석이 가능한 모든 기호의 집합 즉, 인간이 무언가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면 모두 텍스트이다. 그러므로 영화도 텍스트다.
여기 데니스 존슨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기차의 꿈(Train dream, 2025)』이란 영화가 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인공과 거리를 둔 채 세세한 묘사를 놓치지 않는다. 등장 인물이 겪어야 할 감정의 격앙은 나무와 강, 불타버린 오두박, 쓰러진 숫사슴과 어슬렁거리는 곰이 대신한다. 마치 사물과 풍경, 인물을 활자로 눌러 담아 무엇하나 놓치치 않는 한 편의 미니멀리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이렇다보니 당연스럽게 독해의 욕구가 따른다. 기호 하나하나를 모두 뒤집어 보고, 쫓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
영화가 텍스트라면 문예 비평의 틀 안에 부어 넣는 것도 재밌는 시도가 될 것이다. 『문학 동네(2026,봄)』에서 자연과 문학이란 주제로 준비한 특집 자연 시학(詩學), 그 중에서도 신해욱, 임유영 시인과 윤경희 평론가의 글을 통해 영화를 들춰보자.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 신해욱 시인은 이 특집의 문을 여는 「목을 쳐라」라는 글에서 "그냥 그러해서 그러하다는 걸 잊게 만드는 상태"라며 자연의 의미를 풀어낸다. 그리고 이런 "무색무취의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에 선명한 색상 이미지가 응집되었다"며, 자연의 개념이 추상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 영화 『기차의 꿈』에서는 자연의 풍광이 선명한 색상 이미지로 담겨있다. 뇌리에서 되돌리면 숲, 산, 나무, 들판의 풀과 꽃 등 선명한 녹색이 떠오른다. 푸른 하늘과 구름, 개천의 물, 곰과 사슴도 보인다.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 상이 이 영화에는 가득 담겨있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자연의 모습은 매우 구체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자연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면 답하기 어려워진다. 신해욱 시인이 "한편으로는 너무 뚜렷"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흐릿"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벌목으로 베어져가는 나무들, 울창한 숲이 황폐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연은 단지 인간의 수동적 자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숲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의 마음에 반성의 관념이 드리워질 때 자연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임유영 시인은 특집의 두 번째 글 「걷기로 만들어진 선」에서 "엄청난 스펙터클이고 통제불가능하며 언제든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이이라는 자연에 대한 느낌을 말한다. 이 영화에선 난데없이 떨어진 나무 둥치가 애른 피플스(윌리엄 H. 메이시)의 생명을 거두고, 거대한 산불은 로버트 그레이니어(조엘 에저튼)의 아내(펄리시티 존)와 딸을 휩쓸어간다. 시인의 말대로 있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순간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이 난폭한 것인가. 아니다. 자연이 수동적 피해자라거나 난폭한 가해자라는 것은 다분히 인간 중심의 관념이 투영된 말이다. 자연은 그저 스스로 생동하며 세계에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gent)'일 뿐이다.
무의식은 의식적 결정과 행동을 구조적으로 강제한다. 과거의 정신분석학이 그것을 '개인의 내면'에 가둬두었다면, 들뢰즈와 과타리는 '사회-역사적 장 전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제도, 억압 등 사회 전체가 우리 무의식을 구성한다면, 그 사회를 품고 있는 '자연(물질, 생명, 날씨, 대지)' 역시 인간 무의식의 가장 거대하고 근원적인 토대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여기서 500년 산 나무들을 베어"냈고, "본인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영혼에 탈이" 난다는 애른의 말은 바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이니어가 초기에 겪는 죽은 동양 남자에 대한 환영은 그의 개인적인 죄의식을 반영한다. 이 단계에서는 오직 자신 안에 잠재된 닫힌 무의식만이 그레이니어의 의식에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환영 속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주인공을 바라만 볼 뿐, 실제로 영화 내에선 아무런 서사적 기능이 없다. 관객은 그 연유를 궁금해하지만,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이를 해석하려면 온갖 자의적인 추측이 동원되어야만 한다. 이는 마치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을 인간의 내면에만 가두어 두었을 때 발생하는 해석적 한계의 양상과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그레이니어가 가족을 잃고 숲에서 홀로 지내게 되면서, 환각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그에게 보이는 아내와 딸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레이니어와 관객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레이니어의 딸이 부상당한 채 그에게 찾아온 환각도 마찬가지다.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숲(자연)이 스스로 생동하며, 성장하고 다친 모습의 딸을 그의 의식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아빠 노릇을 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던 아내의 예언은, 자연과 접속한 그 하룻밤의 환각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다시 『문학동네 봄호』의 특집으로 돌아가 보자. 윤경희 평론가는 「식물 시학 시론」이라는 글에서 식물 언어의 번역 가능성에 관해 헤트비히 프라운호퍼(Hedwig Fraunhofer)의 이론을 소개한다. 그 요약에 따르면, "식물 번역은 어떤 서식지에 속한 모든 생물 및 비생물 구성원들 내부의 상호 작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그 구성원들은 서식지 안에서 서식지와 함께 끊임없는 대화를 행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앞서 그레이니어의 의식에 작용하는 '무의식으로서의 자연'을 보았다. 환각 속에선 아내와 딸이 그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숲의 나무와 풀과 꽃은 그레이니어에게 도대체 어떤 말들을 건네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그 무성한 침묵의 언어를 의식의 차원에서 번역해 낼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아득한 가능성을 아주 선명하고도 먹먹하게 보여준다.
그레이니어는 숲속에서 종종 목소리를 듣는다. "웃고 떠드는 소리", 바로 불길에 잃어버린 아내와 딸의 목소리다. 그는 그 소리가 행여나 놀라 사라질까 봐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다고 클레어 톰슨(케리 콘던)에게 털어놓는다.
이것은 병리적인 환청이 아니다. 숲이라는 거대한 서식지의 일부로 동화된 그레이니어에게, 숲이 그의 무의식과 상호작용하며 '가족의 목소리'라는 가장 다정하고 이해 가능한 언어로 스스로를 번역해 건네는 눈물겨운 대화의 순간인 것이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유는, 환상이 깨질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숲)와 간신히 이어진 그 조심스럽고 연약한 '번역과 대화'의 얽힘을 끊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다시 신해욱 시인의 글을 인용해 보면, 그레이니어라는 인물에게서 아주 특별한 문학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시인은 '자연 시학'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갈망을 고백하며, "숨은 주어도 생략된 주어도, 형식상의 주어도 없는 출처 불명의 목소리에 양태와 움직임만 실린 문장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레이니어의 출생은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그는 마치 앞서 언급한 자연(自然)의 어원처럼, 그저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영화 안에 존재할 뿐이다. 고아였던 그는 그저 기차에 실려 아이다호로 보내졌고,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생의 기록이 시작된다.
영화는 그의 죽음 또한 시작과 다름없었다고 관조한다. 결국 그레이니어라는 인간 그 자체가 출처가 불명한 목소리이자, 주어 없는 문장이었던 셈이다. 그가 숲의 목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바로 '주어의 목을 쳐버린 문장', 즉 신해욱 시인이 그토록 도달하고자 갈망했던 존재 상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직 문장의 멱을 따는 기술이" 없다는 시인은, "머리를 으깨어 형체를 뭉개고, 뭉개진 채로도 생동하는 말의 기능 세계를 실험"하며 그것이 온전한 "'자연'으로의 접속"이기를 기대한다.
그 간절한 기대를 온몸으로 상징하듯 그레이니어의 기원은 부재하며, 하나의 기호로서 그가 지닌 존재의 의미는 오직 숲(자연)과의 교감과 소통이라는 '얽힘'의 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해석이 가능해진다.
애른이 무분별한 벌목에 따른 우려를 표할 때, 젊은 벌목꾼 하나는 다음 날 아침이면 주머니에 200달러가 들어온다면서 자신의 "영혼은 끄떡없다"라고 콧방귀를 뀐다. 이 오만한 발언은 앞서 언급한 신해욱 시인이 짧게 짚고 넘어간 지점과도 맥을 같이한다. 바로 "근대적 인식 체계가 문명/자연의 이항 대립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이다. 젊은 벌목꾼은 이 근대적 인식 체계하에서 자신(인간)과 쓰러지는 나무(자연)들을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타자로 철저히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이 연결과 분리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내레이터는 "예전에는 구세계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낯선 오솔길, 숨겨진 통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심오한 미스터리, 그것은 만물의 근본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화면이 비추는 것은 나무에 못 박혀 있는 낡은 장화다. 이 장화는 벌목꾼이 사고로 죽었을 때, 일종의 소박한 장례 의식으로서 그가 존재했음을 숲에 남기는 흔적이다. 애른이 죽었을 때, 그토록 애통해하던 빌리(존 딜)는 시간이 흐른 뒤 그 죽음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노환에 따른 인지 장애로 보이지만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억은 희미해져도 '나무에 못 박혀 있는 장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잊어도 숲과 나무는 잊지 않고 기억한다. 자연은 인간을 타자로 분리해 밀어내지 않고, 그 삶과 죽음의 물리적 흔적마저 품어 안아 영원히 간직한다.
결국 문명과 자연의 분리는 인간만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다. 그레이니어는 당시 문명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비행기 안에서 "위인지 아래인지 감각이 사라졌던 그때, 마침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인간이 아무리 거대한 문명을 건설하고 하늘을 난다 해도 자연의 거대한 망(Network)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무한한 연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윤경희 평론가의 글에서 소개한 프라운호퍼는 "브뤼노 라투르와 존로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의 리좀 개념, 그리고 로빈 윌 키머리의 아메리카 선주민 정체성에 기반한 생토론에 기대어 식물 번역에 관한 사유를 아름답고 설들력 있게" 펼친다. 이 세 가지 이론은 모두 근대적 인간중심주의가 그어놓은 분리선(문명 vs 자연, 인간 vs 사물)을 지워버리고, 만물이 어떻게 서로 얽혀서(연결되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가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원작 소설과 영화의 제목은 왜 하필 『기차의 꿈(Train Dreams)』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해 온 사유를 바탕으로, 이 다의적인 제목에 대해 가장 시적이고도 유물론적인 해답을 조심스럽게 내려볼 수 있다.
작품 내내 그레이니어의 삶을 관조하듯 읊조리던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를, '기차'라는 비인간 행위자의 목소리로 치환해 보자. 서사는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경이롭게 탈바꿈한다. 기차는 숲을 베어내고 들어선 근대의 폭력적인 상징인 동시에, 그레이니어를 싣고 대륙의 풍광을 가로지르며 그의 팍팍하고 쓸쓸한 삶의 궤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묵묵한 목격자였다.
인간의 기억은 노환으로 부서져 내리고,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무에 못 박힌 낡은 장화가 죽은 벌목꾼을 기억하듯, 숲을 관통하며 달리는 기차 역시 자신의 품에 안겼던 한 연약한 인간의 생애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
결국 이 묵직한 영상 텍스트는, 그레이니어를 실어 날랐던 거대한 철의 기계가 자신이 통과했던 숲과 그곳에 살았던 한 인간의 숭고한 얽힘을 추억하며 꾸는, 아득하고도 슬픈 '꿈'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문명과 자연, 인간과 사물은 그렇게 서로의 꿈속에서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임유영 시인의 말대로 "자연은 인간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 나무에 못 박힌 장화이든, 땅 밑에 묻힌 시신이든 자연은 그저 '스스로 그러하듯' 존재하면 그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빅 프리즈(Big Freeze)가 도래한다 해도 자연에겐 위기란 없다. 그것이 어떤 상태이든, 자연은 스스로 티끌 하나 없는 완전무결을 구현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뇌과학자 로돌프 이나스(Rodolfo Llinás)의 말대로, 인간의 의식이란 40Hz의 진동 동기화 속에서 일어나는 불연속적 사건에 불과하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의식을 가진 인간'이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일종의 관념일 뿐이다. 사람은 이 미세한 진동을 통해 자연과 끊임없이 얽히고 연결되어야만 그 관념의 삶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다. 죽음은 곧 이 진동의 소멸이다. 자연의 입장에선 생과 사가 단지 분자적 구조의 재배치일 뿐이겠지만, 우리 자신은 그 분자적 구조에 변화가 없다는 이유로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그러하다고 오만하게 말할 처지가 못 된다.
그래서 작금의 '기후 위기'는 자연의 위기가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위기이다. 대기 중의 탄소 농도가 치솟는다 한들, 그것은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에 그 어떠한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임유영 시인의 말대로 우리의 구호는 "'자연을 보호하자'가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자연 보호'라는 말이 "아직 망칠 게 무한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의 여유로움과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시인의 지적을 기억하며, 우리는 이 무한한 얽힘 속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해 나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