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이별이 예정된 도시의 무의식

상징 디코딩 #013: 엇갈린 페르소나와 봉인된 시간

by 나인테일드울프

왕가위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는 현대 영화사를 거론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기념비적인 마스터피스다. 개봉 당해 제53회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양조위)과 기술대상을 받으며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평가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2016년 BBC가 전 세계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선'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했으며, 2022년 영국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가 10년마다 발표하는 '역대 최고의 영화' 선정에서도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이 작품이 단지 2000년대 초반의 아시아 영화라는 지역적, 시대적 한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영화적 유산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하는 지표다.


대중과 평단은 흔히 이 영화를 압도적인 미장센과 숨 막히는 텐션이 돋보이는 세기의 로맨스로 기억한다. 하지만 전 세계가 이 작품에 그토록 오랜 시간 열광하며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진짜 이유는, 붉은빛의 관능적인 표면 아래에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서늘한 시대적, 심리적 텍스트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세계적인 걸작으로 추앙받는 이 작품을 단순한 멜로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깊은 심연의 렌즈로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칼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이 제시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 일국양제의 유통기한 앞에서 분열하던 홍콩의 지정학적 페르소나, 그리고 '시간을 가두는 예술'인 영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메타포까지. 『화양연화』라는 매혹적인 타임캡슐 안에 왕가위 감독이 무엇을 어떻게 봉인해 두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뜯어 보자.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결합

소려진과 주모운은 이사 당일 날에도 용모에 흐트러짐을 찾을 수 없다. 반면, 그들의 배우자들은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소려진(장만옥)과 주모운(양조위)은 같은 날 이사 온 이웃이다. 이삿날부터 소려진의 남편도, 주모운의 아내도 스크린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그들은 오직 뒷모습나 목소리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메라 앞에 선 두 주인공은 항상 목을 꼿꼿이 세운 차파오와 흐트러짐 없는 슈트, 포마드로 빗어 넘긴 머리를 고수하며 완벽하게 통제된 외피를 유지한다.


이러한 단정함과 절제는 칼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적 구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스크린에 현현하는 두 주인공이 외부 세계에 보여줘야만 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면, 철저히 은폐된 배우자들은 그들 내면의 심층, 즉 려진 안의 아니무스(Animus)와 모운 안의 아니마(Anima)를 상징하는 투사체로 볼 수 있다.


융의 관점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인간 무의식 속에 잠재된 반대 성(性)의 원형이다. 자아가 이질적인 내부의 원형을 이해하고 통합하여 내면의 균형을 이루는 과정은 곧 '자기(Self)'에 이르는 성숙의 길이다. 그러나 『화양연화』에서 이 통합의 과정은 기형적인 방식으로 선행된다.


려진과 모운의 배우자가 서로 불륜에 빠진다는 설정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원형적 결합이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결국, 얼굴 없는 배우자들의 배신은 주인공들이 의식적으로 차마 실행하지 못한 금기된 합일을 무의식의 세계에서 먼저 실현해버린 운명론적 사랑의 비극적 은유인 셈이다.


억압하는 무의식

려진과 모운의 배우자들은 둘을 나란히 걷게 만들면서도, 결국 돌아서게 하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두 주인공이 지닌 반대 성(性)의 원형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추동력을 만들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다른 층위에선 '맞바람'이라는 파국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강력한 억제 기제가 작동한다. 극 중 반복되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선언은 표면적으로는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의식적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들이 입고 있는 가면(페르소나)인 차파오와 슈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단순한 윤리 의식을 넘어 호환되지 않는 두 층위의 집단 무의식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정체성의 교착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모운의 슈트는 '영연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이는 홍콩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이식된 근대적 질서의 원형이다. 주모운의 말끔한 슈트와 합리적인 태도는 영국적 신사도와 서구적 근대성이 홍콩인들의 무의식 속에 '세련된 문명'의 형태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한다.


반면 려진의 차파오는 1960년대 홍콩 이주민들이 고수하던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시각화한다. 이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혈연, 문화, 예의(체면)라는 문화적 원형(Cultural Archetype)에 뿌리를 둔다. 소려진이 남편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정숙한 아내'라는 형식을 고집하는 것은, 대륙에서 건너온 상해 이주민 집단이 공유하던 보수적 윤리관이라는 집단 무의식이 발현된 결과다. 그녀에게 차파오는 의복이기 이전에, 무너져가는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결국, 려진과 모운이 본능적 추동(아니마/아니무스)을 끝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이유는 단순한 도덕적 절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적 전통과 영연방적 근대성이라는 이질적인 두 집단 무의식이 결합하여 형성된 두 정체성 사이의 근본적인 불호환성에 기인한다. 각자가 고수하는 '말끔한 페르소나'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석의 양극인 동시에, 결코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기름과 물과 같다. 전통적 예의(리전)와 근대적 합리성(모운)은 각자의 문법 안에서만 완결성을 지니며, 이 두 문법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들은 행동의 양식을 찾지 못하고 정지해버린다.


무의식으로서의 도시

붉은 커텐으로 치장한 호텔의 2046호실은 일국양제가 종료할때까지의 홍콩을 상징한다. 이 안에서 두 사람은 무협지를 쓴다.


비록 1984년의 공식 선언 전이었으나, 1960년대 홍콩인들에게 1997년이 되면 영토의 9할을 반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상식에 가까운 부채감이었다. 왕가위 감독이 영화 개봉 시점에 이미 고희(古稀)를 넘긴 세대의 이야기를 소환한 이유는 홍콩 반환을 전후로 표출된 도시적 불안과 우울의 기원을 되짚기 위함이다. 그는 이전 세대가 향유했던 화려함이 결코 지금과 다르지 않으며, '화양연화'에 대한 집단적 추종이 홍콩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되는 도시의 무의식임을 역설한다.


려진과 모운의 페르소나가 충돌하며 멈춰버린 '불호환성'이 유일하게 유예되는 곳은 2046호실이다. 이 숫자는 단순한 방 번호를 넘어 일국양제가 종언을 고하는 2046년, 즉 홍콩의 시한부적 운명을 상징한다. 호텔 전체를 지배하는 붉은 미장센은 그 상징성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며, 이 방을 현실(의식)의 논리가 잠시 멈춘 '홍콩의 무의식적 자궁'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곳에서 두 주인공이 무협 소설을 집필하는 행위는, 현실의 우울과 불안을 투영하며 허구에 몰두했던 90년대 당시의 홍콩을 떠올리게 한다. 홍콩 누아르의 거장 오우삼이 자신의 영화를 '현대판 무협지'라 정의했듯, 이는 칼을 쥔 손에 총을 쥐여준 서사의 변형이다. 할리우드가 『다이 하드(Die Hard, 1998)』를 통해 서부의 카우보이를 나카토미 빌딩이라는 현대적 밀실로 밀어 넣었듯, 홍콩의 감독들은 90년대의 방 안에 협객의 의리(義)와 비장미를 이식한다. 왕가위 감독은 이 2046호실에서 쓰여진 무협지를 그 누아르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결국 영화는 만개(滿開)한 홍콩 누아르의 뿌리를 1960년대라는 잠복기에서 찾아내며, 이제는 노인이 된 세대까지 그 문화적 정서 안으로 포섭한다. 그리고 무의식으로서의 이 도시는 소려진과 주모운으로 대표되는 이질적 정체성을 포함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원형의 결합은 이루어졌으나, 서로가 결코 호환되지 않는 복잡한 양상의 도시. 그 무의식이 예술에 작용하는 방식을 매혹적인 영상과 탐미적인 로맨스로 포장해 관객에게 선사한 영화, 그것이 바로 『화양연화』의 실체다.


시간을 가두는 예술, 앙코르와트에 봉인된 영원

주모운이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묻기 시작할 때 빛이 산란한다. 빛과 함께 봉인하는 '화양연화' 그것이 영화다.


『중경삼림』 비평을 통해 살펴보았듯, 영화는 본질적으로 시간을 가두는 예술이다. 왕가위 감독은 이 매체의 속성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영화에서도 마치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 시계를 집요하게 비추며, 시간을 봉인하는 그만의 의식을 치른다.


카메라의 프레임 안으로 현실의 빛과 소리를 포획하고, 그것을 필름이라는 물질 속에 고정시켜 '오늘을 가둬 내일로 보내는' 작업이다. 『중경삼림』이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통해 1990년대 홍콩인들의 유한한 시간을 감각적으로 포착했다면, 『화양연화』는 한발 더 나아가 특정 시대의 공기와 정체성 전체를 영원히 봉인하는 거대한 의식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말미, 주모운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오래된 사원을 찾는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벽의 구멍에 입을 맞추듯 자신의 비밀을 속삭인 뒤, 진흙을 이겨 그 구멍을 단단히 틀어막는다. 모운이 들려주었던 옛 전설을 재현하는 이 의식은 우리가 소중한 기억을 타임캡슐에 묻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영화'라는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한 완벽한 메타포다.


카메라의 렌즈는 비밀을 삼키는 구멍이 되고, 편집된 필름은 시간을 고정하는 진흙이 된다. 왕가위 감독은 2046년이 되면 완전히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는 홍콩의 '화양연화(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를 1960년대라는 잠복기에서 길어 올려, 앙코르와트라는 거대한 인류 역사의 퇴적층 한가운데에 영구히 박제했다.


그리하여 왕가위가 스크린에 가두어 둔 1960년대 홍콩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은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우리의 오늘로 당도한다. 그 기묘한 부정교합을 함께 싣고서 말이다.


마무리: 또다른 려진과 모운

주모운 몰래 싱가포르에 찾아가 그의 빈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려진의 모습은, 몸은 떠났어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긴 짙은 흔적을 표상한다.


소려진과 주모운 관계의 시작은 이웃으로서 서로의 직업을 통해 생활의 편의를 봐주던 사소한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때 남자가 여자에게 처음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배표(선박 티켓)'였다. 아마도 이는 언젠가 려진을 떠날 수밖에 없는 모운, 즉 처음부터 이별이 예정되어 있던 두 사람의 운명을 미리 암시하는 은유적 장치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홀로 떠나는 모운의 뒷모습은 90년대 반환의 불안을 피해 홍콩을 등지던 엘리트들의 이민 행렬과 절묘하게 겹쳐진다.


훗날 주모운 몰래 싱가포르에 찾아가 그의 빈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려진의 모습은, 몸은 떠났어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긴 짙은 흔적을 표상한다. 하지만 표면에선 물과 기름처럼 끝내 섞일 수 없는 근본적인 '불호환성'은 그녀를 결국 홍콩으로 돌려보낸다.


이러한 분열과 불호환의 양상은 비단 홍콩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층위에서도 비슷한 궤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른바 '화교'라 불리는 오래된 정착민 세대와 90년대 이후 새로이 유입된 중국인 이주민들은 같은 뿌리를 공유함에도 우리 사회 안에서 좀처럼 섞이지 못한 채 이질적인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짜장면과 마라탕은 정확하게 이를 표상한다. 이는 마치 려진(전통적 정착)과 모운(근대적 이주)이 도시라는 거대한 무의식 속에서 각자 다르게 작용하며, 끝내 호환되지 않는 페르소나를 짊어지게 된 영화 안의 세계와도 비슷하다.


결국 『화양연화』는 엇갈린 두 남녀의 멜로를 빌려, 섞일 수 없는 정체성들이 빚어내는 보편적인 시대의 우울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리마스터링 2022)』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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