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디코딩 #001: 바톤 핑크의 지옥도, 광기의 아가리가 삼킨 세계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이질적이고 특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부터 시작해 줄곧 명확한 리얼리즘의 영토에 머물렀던 그의 전작들을 되짚어 볼 때, 이토록 서사가 모호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아득하게 넘나드는 영화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감독은 시대의 폭력에 짓밟힌 개인의 고통을 직설적인 분노와 짙은 연민의 화법으로 스크린에 소환해 왔다. 분노해야 할 대상이 명확했던 과거와 달리, 현대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가해자도, 폭력의 실체도 보이지 않는 안개 그 자체다. 감독은 이 원인 모를 막막함과 억눌린 분노를 대변하기 위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위에 윌리엄 포크너의 계급투쟁을 덧씌우는 파격적인 문학적 실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긴 짙은 피로감과 난해함은 단순히 서사의 불친절함이나 세상의 불투명함 때문만은 아니다. 스크린 위에는 시종일관 현실을 기록하는 척하면서도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편집되고 창조된 듯한 기묘한 '작위성'이 흐른다. 이 낯선 모호함의 정체를 온전히 해독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가 구축해 놓은 텍스트의 표면을 넘어 카메라의 시선 뒤에 숨겨진 '화자'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여타의 것과 선명하게 다른 점이 바로 이종수(유아인)라는 존재다. 이 인물은 두 장면을 제외한 영화의 모든 시퀀스에 등장한다. 이는 마치 '나'를 화자로 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과 비슷한 연출이다. 보통의 영화가 3인칭을 유지하며,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들이 꽤 나온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REC(2007)』과 같은 극단적인 1인칭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운드 푸티지라는 장르적 특성의 극대화였을 뿐 이런 문학적 연출은 아니었다.
이러한 연출의 특성은 이 영화 전체가 이종수가 쓴 오토픽션일 것이라는 의심, 아니 확신을 갖게 한다. 앞서 말한 두 장면 중 하나로, 극 후반에 벤(스티븐 연)이 연수(김수경)에게 화장을 해주는 장면에서는 이종수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오감이 닿지 않는 곳의 사건, 인물을 묘사하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의 창작자, 작가에게만 주어진 권능이다. 이 시퀀스의 직전에 종수가 타이핑하는 장면은 이 모든 서사의 저자가 바로 그라는 방증이다. 창문 너머로 그를 비추며 점점 멀어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가 창조한 세계가 그 방 안에 있다는 일종의 암시처럼 보인다.
오토픽션이란 자기 자신을 뜻하는 'Auto'와 허구를 뜻하는 'Fiction'의 합성어로, 작가가 자신의 실제 삶을 소재로 하되 소설적 상상력과 허구적 요소를 더해 재구성하는 문학 장르이다. 자서전의 사실성과 소설의 예술성을 결합한 형태이며, 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활용해 실제 경험과 허구 사이의 긴장감을 창출하는 특징이 있다.
작중 내내 나오는 실제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이야기, 실체가 목격되지 않는 존재 등 서사의 허구성은 종수의 현실성과 맞물려 묘한 긴장을 이룬다. 이 긴장감과 연출의 특징을 문학 장르의 정의와 함께 살펴보면 이 영화 전체가 이종수가 쓴 오토픽션이라는 확신을 거두기 힘들다.
『매드니스(In the Mouth of Madness, 1995)』는 소설 속의 괴물을 현실에 등장시키고, 현실을 다시 영화 속에 펼치며 허구와 실제를 뒤섞어 압도적인 코즈믹 호러를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장르는 다르지만 이 영화 『버닝』에서 펼쳐지는 현실과 허구의 혼합 또한 무언가를 강렬하게 드러내기 위한 서사의 전략이다.
『문학동네 2026년 봄호』에서 단요는 팀 오브라이언의 『미국 환상곡』이라는 소설을 소개하면서 작가가 "이야기된 진실이 일어난 진실보다 더욱 참될 수 있음을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종수의 소설 안에서, 지어낸 것으로 확정된 사건은 바로 종수가 벤을 찌르고 불에 태우는 마지막 장면의 살인이다. 이 장면에서 '이야기된 진실'은 어떤 '더욱 참된 것'을 드러낼까?
영화 속에서 신해미(전종서)의 실종 사건은 명확한 해답 없이 끝난다. 해미는 종수가 아주 명확하게 욕망하는 대상이고, 이는 다시 현실 청년들이 가지는 사회적 욕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 존재가 제대로 밝혀진 이유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없는 현대 사회의 불투명함과 현실의 막막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느껴지는 무력감은 곧 분노가 된다. 벤을 살해하는 장면은 바로 종수의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가 이 장면을 자신의 작품에 녹이는 이유는 바로 이 분노를 더욱 참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단요는 오브라이언에게 "허구를 디딜판으로 써도, 공동체의 성원들이 궁극적으로는 진실을 추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를 『버닝』에 대입하면 세상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더라도, 우리는 결국 이야기(허구)를 통해 이 분노의 근원을 찾아낼 것이라는 문학 본연의 긍정으로도 읽힌다. 가짜 뉴스의 허구가 이념 대립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조금 순진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분기점이 있다. 하나는 해미가 사라진 후 종수가 그녀의 행방을 쫓기 시작하는 시점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만나 우물이 실재했다는 말을 듣는 시점이다.
두 번째 분기점까지 영화는 신해미의 행방을 쫓고, 벤의 범죄 증거를 찾지만 드러나는 것은 빚과 이를 피해 잠적했을 가능성이다. 해미의 가족이 우물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녀가 거짓말(이야기)을 지어내는 데 능숙하다는 증언은, 벤의 범죄를 의심하는 종수의 가설을 일축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만남에서 우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해미가 들려준 일화는 비로소 사실일 가능성을 획득한다. 추상적이었던 욕망의 대상이 구체화되는 이 반전의 흐름은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놀랍게도 종수가 어머니의 '500만 원 빚을 자신이 감당하겠다'라고 선언한 직후부터다.
이후의 이야기는 종수의 의심이 사실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벤의 화장실 서랍장에선 해미의 시계가 발견되고, 보일이라 부르면 다가오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해미 때와 비슷한 구도로 진행되는 모임에서 벤의 하품은 작가인 종수가 인물의 성격을 확정하는 사건이다.
종수의 수단은 당장 쥐고 있는 현금이 아니라 미래를 저당 잡히는 '신용'이라는 점에서 더욱 뼈아프게 적절하다. 빈곤한 청년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지켜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국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바치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모든 공기는 바로 이 서늘한 자본의 논리 앞에서 바뀌기 시작한다.
종수가 오토픽션으로 참되게 드러내려 한 것이 분노였다면, 여기엔 공동체 성원들이 이 서사적 기제를 발견해 주리라는 작가로서의 믿음이 함께 깔려 있다. 즉, 대가를 지불할 수만 있으면, 벤의 연쇄 살인이라는 '허구'마저 '사실'로 구축해 내는 서늘한 자본의 논리를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담론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왜일까?
이 영화 『버닝』의 주인공 이종수는 여러모로 현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청년을 대변하기 위한 인물이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음을 밝혀왔다. 이런 취지라면 이종수라는 인물에게 바라는 효과는 단 하나다. 관객이 이 인물을 통해 서사로 이입하는 것, 이른바 동일시라 부르는 작용이다.
다시 한번 『문학동네 2026년 봄호』를 인용하자면, 인아영 평론가는 이 동일시에 대한 "독자와 인물 간의 동일시는 세대와 젠더의 정체성을 기반"한다는 자연스러운 전제를 지적하면서, "주체나 대상의 조건을 투명하게 투영하는 자동화된 메커니즘"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오히려 "동일시란 차라리 뿌옇고 지저분한 거울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라며 "그 불투명한 지대야 말로 풍요로운 독해와 정교한 담론의 산실"이라고 했다.
이종수가 영화에서 보이는 말과 행동, 그가 처한 현실은 청년 세대 정체성을 맑게 투영한다. 하지만 평론가의 말대로라면 그 세대의 관객이 자동으로 종수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문예 창작이라는 전공, 소설가라는 꿈, 좋아하는 작가가 '윌리엄 포크너'라는 종수의 개별성 안에 자신을 끼워 넣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세대가 주로 향유하는 문화가 웹소설, 웹툰, 유튜브, 게임 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물론 문학을 사랑하고, 작가를 꿈꾸는 청년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세대를 대변한 인물로서 이입을 위해선 넓은 이해의 강을 건너야 한다.
거기에 윌리엄 포크너는 이해의 장벽을 더 높게 세운다. 포크너가 하루키의 원작과 제목이 같은 『헛간을 태우다』라는 소설을 썼다는 점, 주로 계급투쟁을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는 것을 알아야 의미가 온전히 이해된다. '풍요로운 독해'와 '정교한 담론'을 얻기 위해서는 매우 넓은 '불투명한 지대'를 탐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청년 관객의 이종수에 대한 동일시는 충분히 이루어진다.
문제는 감독이 상상한 청년의 모습, 즉 관객에게 내민 '뿌연 거울'의 프레임 자체가 다소 낡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거울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윌리엄 포크너를 위시한 상당한 문학적 소양까지 요구된다. 결국 이 동일시에 실패한 관객에게 들리는 것은 "아저씨가 어린 시절 소설가가 꿈이었을 때 포크너를 좋아했어"라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목표했던 관객 층과 어긋나며, 서사의 모호함은 부르주아적 탐미주의로 비치는 계급 배반적 작품이 되어버린다. 쉽게 얘기해서 아저씨들이 모여서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라는 말을 되게 모호하게 하는 영화가 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청년 세대의 어려움에 공감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대중적인 당사자성 획득에 실패하고 모호함의 미로 속에 갇힌 이유는, 영화의 진짜 원형(Archetype)이 청년 르포가 아니라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Barton Fink, 1991)』에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을 예찬하지만 정작 옆방에 사는 진짜 보통 사람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았던 엘리트 극작가 바톤처럼, 종수 역시 가난한 흙수저 청년의 껍데기를 썼을 뿐 윌리엄 포크너의 관념에 갇힌 지식인의 자아를 가졌다. 창작의 위기 속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하거나 실종된 여성(오드리와 해미)은, 두 작가가 현실을 벗어나 기괴한 허구의 지옥도로 진입하게 만드는 결정적 트리거로 작동한다.
이 평행이론의 백미는 살인마의 존재와 불타는 공간의 일치다. 『바톤 핑크』에서 연쇄 살인마 찰리가 불타는 자기 방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바톤의 시나리오 속의 것인지, 실제인지'에 대한 오랜 해석 논쟁을 낳았다. 그리고 이는 『버닝』의 결말부에 그대로 이식된다. 종수가 소설을 쓰는 장면을 보여 준 후, 공터에서 벤을 찌른 후 포르셰에 밀어 넣고 불태우는 장면은 다시 한번 현실과 허구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버닝』은 하루키의 원작에선 소재를 차용했을 뿐, 오히려 『바톤 핑크』를 철저하게 계승한다. 감독은 인물의 구도를 변형하고 모호한 서사라는 특징을 그대로 이으면서, 포크너의 계급의식, 대한민국 청년 세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 틀에 부어 넣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 바톤의 타자성은 종수라는 허구의 저자를 건너서, 이 이야기를 만든 이창동 감독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일어난 '동일시'는 관객과 종수 사이의 공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고통을 대변하려 했으나 결국 자기 관념의 지옥에 빠져버린 바톤 핑크'와, '청년 세대를 위로하려다 엘리트주의적 한계를 노출해 버린 이창동 감독' 사이의 뼈아픈 동일시였다.
결국 바톤은 시나리오가 엉망이란 평가를 듣고 계약을 해지당하기까지 한다. 『버닝』의 흥행 실패는 이 서사와 연결되어 그의 대본으로 영화로 만든 듯한 현실 세계의 재현으로 이어진다.
『바톤 핑크』에서 지옥의 불길을 몰고 오는 살인마 '찰리'의 기괴한 속성을, 『버닝』에서 미스터리한 방화범이자 악의 상징인 '벤', 마지막에 분노를 폭발시키며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화자 '종수' 두 명이 나누어 가진다. 그리고 바톤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메가폰을 잡는다.
이건 마치 소설과 영화의 내용이 현실을 뚫고 나온 『매드니스』의 세계를 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더군다나 가짜 뉴스의 허구가 현실을 침식하는 작금의 상황에선, 당사자의 이입을 불허하는 이 텍스트가 결국 상호의 몰이해로 '광기의 아가리에 들어 선 세상'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추신: 나머지 한 장면
이 영화에서 이종수가 등장하지 않는 나머지 한 장면은 바로 비닐하우스가 불타는 꿈이다. 거기에선 어린 시절의 이종수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하긴 한다. 성인 이종수가 아니라는 점을 엄밀하게 적용하여 예외 장면으로 분류했다. 실제로 이종수가 완전히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하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