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 안전한 이입의 끝에서 마주한 씁쓸함

시선 디코딩 #002: 여지와 만만함, 그리고 부서진 알리바이

by 나인테일드울프

영화 『무뢰한(2015)』은 개봉 당시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게 평가받는, 이른바 '괴물 같은 멜로'로 꼽힌다. 오승욱 감독의 치밀한 연출과 전도연, 김남길 배우의 절제된 연기가 만나 한국 누아르의 문법을 비튼 수작으로 평가받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누아르 특유의 마초적이고 차가운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남녀의 미묘한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사랑조차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구걸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적인 묘사가 압권이다.


낮고 가라앉은 채도, 새벽의 축축한 공기로 인물들의 고립감을 시각화한 이 작품에선, 김혜경(전도연)이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화장을 고치는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피로함'과 '갈망'을 동시에 담아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예의와 염치를 모르며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박준길(박성웅)인가? 아니면 정재곤-이영준(김남길)인가?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도연 배우 개인이 빚어낸 몰입도

image.png 김혜경이란 캐릭터에는 전도연 배우가 지금까지 연기한 화려한 배역과 소박한 배역이 모두 담겨 있다.


영화 내내 김혜경에게 보이는 것은 관능과 피로다. 화려한 원피스, 붉은 립스틱, 위태로운 하이힐 등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늘 지독한 ‘삶의 피로’가 묻어 있다. 이 이질적인 결합은 남성 관객들로 하여금 묘한 보호본능과 가학성, 그리고 성적인 욕망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혜경의 화려한 면모만 비추는 것은 아니다. 혜경은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그것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먹는 데서 행복감을 느끼는 여자다. 밤을 같이 보낸 후 이영준에게 짧게나마 내비친 모습은 이런 소박한 모습이었다. 그에겐 평범한 삶에 대한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김혜경이란 인물의 표면에는 『헤피엔드(1999)』의 최보라가 살아서 세월을 보낸 모습이 갖춰져 있다면, 요리를 하며 보통의 일상을 꿈꾸는 이면에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의 정원주의 모습이 이어져 있다. 혜경은 기실 이 두 캐릭터뿐만 아니라 그간 전도연 배우가 연기한 팜므파탈과 순애보의 얼굴이 두루 갖춰진 인물이다.


그래서 배우의 외양과 연기는 일종의 역사성을 띠며, 우리 영화에 대한 소양이 높은 관객일수록 더 입체적인 자극을 받는다. 가히 이 영화에서 관객의 몰입은 전도연이란 배우 한 사람이 이뤄낸 성취라고 할 만하다.


여지와 만만함

image.png 혜경은 자신이 쉽지 않은 상대란 걸 내세우지만, 영화의 태도는 조금 다르다. 다가설 수 있는 여지를 계속 보여 준다.


혜경은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에 실린 욕망을 잘 안다. 필요하면 이용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확실히 차단하며 만만치 않은 상대란 걸 항상 내세운다. 이영준을 처음 대면한 날, 그의 반말지거리에 확실한 항의, 성희롱에 가까운 언사에는 '병X'이라는 욕설을 내뱉고, 영준의 거짓말을 하나하나 다 까발리는 것은 자신을 쉽게 보지 말라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필요하니까 말로는 빌린다며, 영준의 지갑을 털어가기도 한다. 이렇게만 보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대해야 할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영화의 태도는 조금 다르다. 혜경에게 계속해서 다가설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려 한다. 초반에 영업 후 혼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장면, 새벽에 홀로 귀가하는 장면에선 특히 그렇다. 그리고 이 여지는 영준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영준이 해장국 가게에서 은근슬쩍 동석할 때 상당수의 남성 관객은 이미 그 옆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여지는 곧 만만함으로 확장된다. 영화 내내 민영기(김민재)는 김혜경에게 껄떡댄다. 여성 관객이 그녀에게 이입하는 순간 심한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한다. 이 둘 사이에 강조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바로 김혜경의 신분이 과거에는 꽤나 고귀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하강은 현재 시점에서도 멈추지 않고 진행 중이다. 그리하여 이 추락이 과거에 감히 생각하기 힘들었던 여자를 지금은 넘볼 수 있다는 만만함을 형성한다. 민영기는 정확하게 이것에 기반하여 움직이고, 이 정서는 이영준을 통해 혜경을 바라보는 남성 관객들도 느낄 수 있다.


파수꾼의 착취

image.png 이 날카로운 눈매의 남성은 혜경을 관음 하던 시선이 움찔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김혜경에 접근하는 것이 아무런 위험 부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고 곁에 두는 남자는 다름 아닌 박준길이라는 살인범, 폭력배이다. 그리고 그는 김혜경의 파수꾼이다. 영화 내에서 문제가 되는 살인 사건은 바로 빚을 받아내려 혜경을 괴롭히던 조직원을 준길이 죽인 것이다. 그리고 정재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둘의 침실을 덮쳤을 때, 준길은 암묵적으로 동의를 구하고 나체로 잠든 애인의 몸을 담요로 덮어 준다.


이는 그녀를 향한 재곤의 시선을 알아채고 난 다음에 하는 행동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재곤의 시선과 일치하고, 결국 관객도 마찬가지로 혜경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준길이 담요로 혜경의 몸을 덮는 것은 정재곤에게서 그녀의 몸을 가리는 것이지만, 결국 관객의 관음적인 눈길을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 혜경을 욕망하는 관객에게 일종의 부담을 느끼게 된다. 사납고 무서운 폭력배, 사람을 향해 서슴없이 칼을 휘두르는 파수꾼이 지키는 혜경을 향한 욕망은 여기서 움츠려 든다. 관객에게 박준길은 너무나 불편한 존재다. 영화가 굳이 나체를 드러내어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내 볼거리를 빼앗긴 불만'과 '흉폭한 수컷을 향한 본능적 위축'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관객에게 또 다른 도덕적 우월감과 당위를 만들어 준다. 혜경을 단란주점에 맡기고 이른바 '마이깡'으로 5천만 원을 착복하기도 하며, 상해로 도주하기 위한 자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혜경의 5억이 넘는 채무도 박준길의 책임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일부러 박준길을 거칠고 문제적인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관객이 이영준의 기만적인 접근에 완벽한 도덕적 면죄부를 쥐여주도록 판을 깐다. 이영준의 시선 뒤에 안전하게 숨은 관객은 이제 혜경을 구원한다는 알량한 명분 아래, 하루빨리 준길을 치워버리고 그녀를 '탈취'하길 간절히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 관객의 이입

image.png 파수꾼이 사라져야 빚에 쫓기는 술집 여자와 그녀를 좋아하는 영업부장 사이의 한결 가볍고 만만한 로맨스가 펼쳐진다.


형사 정재곤은 살인범 박준길을 쫓기 위해 김혜경을 이용하려는 자다. 수사의 편의를 위해 이영준이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고 혜경이 마담으로 있는 단란 주점의 영업부장으로 위장한다.


정재곤이 이영준으로 위장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박준길과 첫 대면 후 그를 놓친 직후이다. 박준길과 엉켜 싸우며 뒹굴고, 폭력과 생명의 위협은 오롯이 '형사 정재곤'이라는 껍데기가 감당한다. 관객은 이 위험천만한 순간에는 철저히 제삼자의 위치로 물러나 방관할 수 있다.


가장 껄끄럽고 위험한 수컷(박준길)이 형사의 그물에 쫓겨 시야에서 사라지자, 영화는 곧바로 '영업상무 이영준'이라는 가짜 신분을 꺼내 든다. 폭력의 위험이 제거된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상태가 되어서야, 관객은 이영준이라는 낭만적인 대리자의 등 뒤에 숨어 안전하게 김혜경에게 이입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이 혜경을 관음하고 욕망하게 만들려면, 진짜 현실을 잠시 가려두고, 마치 통속적인 멜로드라마 같은 가짜 상황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다. 형사와 주요 참고인(혹은 용의자)의 로맨스는 『원초적 본능』, 『헤어질 결심』처럼 그 팽팽한 긴장감 자체가 장르적 쾌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관객은 지금 스릴을 바라지 않는다. 그 스릴은 이미 형사 정재곤이 일찌감치 멀리 쫓아내 버렸다.


영화는 빚에 쫓기는 술집 여자를 좋아하는 영업부장이라는 한결 가볍고 만만한 허구적 대리자를 만들어 관객에게 입혀준다. 이제 관객은 안전하게, 여지를 보이는 그녀를 만만하게 여기며 욕망할 수 있다.


욕망의 실현, 뒷걸음질

image.png "그걸 믿냐?"라는 한 마디 이후 그녀의 표정. 이 영화는 전도연 배우의 연기 차력쇼다.


박준길이 상하이로 도주하기 위한 자금 3천만 원을 요구하고, 필요하면 이영준을 유혹하라는 말에 혜경의 심정은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약점이 된다. 혼잡한 속을 달래려 과음한 그녀에게,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영준이 초췌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로가 솔직하게 약점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그녀는 영준에게 마음을 열며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도 내비친다. 그렇게 관객의 욕망은 혜경과 밤을 보내는 영준을 통해 성취된다.


다음 날, 영준은 준길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 하자고 슬쩍 혜경의 마음을 떠본다. 행여나 받아들일까 봐 걱정했던 것일까. 혜경이 진심이냐고 되묻자 영준은 얼른 말을 물린다. 고개를 숙인 채 국수를 먹는 혜경, 문을 나서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다. 이영준이라는 얄팍한 동아줄의 실체를 간파한, 혹은 또 한 번 남자에게 속고 기만당했음을 직감한 여자의 뼈저린 체념이 보인다.


5억의 빚, 범죄자 애인, 시궁창 같은 삶. 이영준(그리고 관객)은 그녀의 육체와 매력만을 원했을 뿐, 그녀의 망가진 삶 전체를 책임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그걸 믿냐"라며 비겁하게 말을 주워 담는 이영준의 모습은, 구원을 핑계로 관음증을 채우던 관객들의 위선이 발가벗겨지는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다.


결론: 이제 그만 가세요.

image.png "영화 끝나습니다. 이제 그만 가세요."


형사 정재곤이 이영준으로 위장하여 펼친 이 수사는 결국 박준길을 사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 과정에서 혜경은 영준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둘은 조사실에서 마주 앉는다. 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듯 냉랭한 모습을 하는 재곤 앞에서 혜경은 분노와 배신감, 실망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다.


시간이 지난 후 마약 중독자의 수발을 들며 비참한 생을 이어가는 혜경 앞에 다시 나타난 형사 정재곤.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혜경에게 품은 욕망을 부정하는 모습은 위선적이다.


마지막, 혜경은 재곤을 이영준이라 부르고, 돌아서는 그를 칼로 찌른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재곤-영준에 대한 단호한 거절. 그리고 그것은 관음하고 욕망하던 시선을 이제 그만 거두고 돌아가라는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하는 작별인사다.


칼에 찔린 정재곤은 반격하거나 수갑을 채우는 대신 비틀거리며 도망친다. 그러면서 내뱉는 허세와 냉소가 뒤섞인 처연한 인사말 "복 많이 받아라, 씨XXX"이라는 대사. 결국 여자를 구원하겠다는 명분도, 성적 욕망도 모두 거부당한 채 비틀거리는 남자는 자신의 등 뒤에 숨은 시선들을 아는지 모르겠다.


이 글은 에세이에 진솔한 마음을 담아 쓰라는 찰리 사스필드(『더 웨일』)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Thank him!



image.png 무뢰한(2015)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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