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과 윤희에게: 다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

[특별 편] 가족 디코딩 #001: 모두가 누구에게나 다정하길...

by 나인테일드울프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온벼리 작가의 그 어떠한 강요와 협박, 강압적 수단이 없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진짜입니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2022년작 『더 웨일(The Whale)』은 찰리 사스필드(브랜든 프레이저)라는 폭식증에 걸려 거대한 몸집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2019)』는 김윤희(김희애)와 딸 박새봄(김소혜)으로 구성된 한 이혼 가정의 낯선 여행이 주무대이다. 밀실 안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남자와, 일상을 벗어나 눈 덮인 타국으로 향하는 여자. 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세계는 흥미롭게도 하나의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그리고 이 기묘한 평행이론은, 상처 입은 현실의 가정을 기록한 한 권의 에세이(『다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와 맞닿으며 '진정한 돌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최근 발행한 『역사비평 2026년 봄호』에서 「혐오의 역사와 극우정치」라는 특집으로 동성애와 장애 등에 강요된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를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감의 능력",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잇는 연대의 언어"를 복원해야 한다는 그 다급한 요청에 대해, 두 영화와 현실의 가정을 통해 그 희망의 실마리로 응답하고자 한다.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움직이는 원심력과 구심력

image.png 독특한 동질성을 가진 두 가정이 상처를 마주하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한 명의 딸은 낯선 이국으로 엄마를 이끌고, 다른 딸은 아빠의 어두컴컴한 집으로 찾아든다.


『윤희에게』와 『더 웨일』의 두 주인공은 성별은 다르지만 기묘한 동질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먼저 둘 모두 동성애자이면서 이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었고, 딸을 하나씩 두고 있다. 찰리는 가정을 파괴하고 탈주한 이후 연인을 잃은 지독한 상실감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거대한 육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윤희는 그 정상성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한 대가로 생기를 잃고 서서히 영혼이 말라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


딸 새봄의 개입으로 윤희는 답답한 한국의 일상을 벗어나 눈 덮인 오타루라는 낯선 외부 공간으로 여행한다. 공간의 확장이 곧 내면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서사이다. 반면 찰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육체에 갇혀, 어둡고 좁은 집 안으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간다. 하지만 딸 엘리 사스필드(세이디 싱크)가 밖에서 그 닫힌 밀실을 부수고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구원의 실마리가 열린다. 전자의 서사에선 원심력이, 후자의 것에선 구심력이 작동하고 있다.


두 영화를 비교할 때 딸의 태도가 완전히 정반대라는 점은 매우 재밌다. 새봄이는 닮기를 바랄 정도로 엄마가 예쁘다고 말하는데, 엘리는 찰리를 역겨워한다.


여기 영화가 아닌 현실에 한 가족이 더 있다. 온벼리 작가의 첫 자녀는 공교롭게도 윤희의 딸과 이름이 같다. 이 새봄이에겐 뇌수막염으로 인한 장애가 있고, 여기엔 엄마의 자책이 함께 한다. 이 가족은 다른 가정이 겪지 않았을 수많은 일들을 겪는다. 한밤중에 응급실을 달려가는 것은 예사이다. 경험이 없는 엄마는 충격과 고통에 지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러 직업을 구하고 딸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만들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이것도 금방 중단한다. 이 가정에겐 앞서 살펴본 구심력과 원심력이 영화처럼 두드러지진 않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다. 여러모로 현실은 영화보다 극적이지도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다.


돌봄을 가장한 억압, 몰이해

image.png 윤희의 오빠 용호와 토마스는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다. 이는 돌봄을 가장한 억압과 강요일 뿐이다.


『윤희에게』에서 새봄이가 삼촌 김용호(김학선)에게 필름을 무료로 현상할 때, 윤희는 자신의 오빠임에도 그런 식으로 빚을 져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가족 안에서 분명 무언가 껄끄러운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은 영화 말미에 모두 밝혀진다. 그녀의 가족은 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상성을 강요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다. 그 과정에 앞장섰던 사람이 오빠로,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 인호와 결혼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인생을 파탄 낸 장본인이다. 동네를 떠나려는 윤희를 주저앉히기 위해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해와 존중은 없다. 강요만 있을 뿐이다.


『더 웨일』에선 이 당사자에 대한 몰이해가 더욱 극적이다. 찰리의 폭식은 스스로 말라비틀어져 죽어간 연인을 대신해 먹는다는 속죄적 행위를 넘어선다. 사실 이것은 모티프로 삼은 『모비 딕』의 고래에 대한 동경과도 관련이 있다. 들뢰즈는 이 고전을 인용하면서 에이해브 선장의 추격을 ‘모비 딕’이란 특이자를 통한 동물-되기의 서사로 해석한 바 있다. 이 해석을 연장하면 찰리의 폭식과 몸집의 거대화는 인간의 감정과 고통(에이해브의 분노)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거대한 동물, 즉 '고래' 그 자체가 되려는 실존적 투쟁이다.


그러므로 선교사 토마스(타이 심킨스)의 구원 서사는 매우 폭력적이고 기만적이다. 찰리는 인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생성'의 과정을 겪고 있는데, 토마스는 그것을 그저 동성애와 식탐이라는 기독교적 죄악으로 납작하게 오독하며 찰리를 부정한다. 이 두 영화에선 결국 돌봄을 가장한 억압과 당사자에 대한 몰이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장애 자녀를 키우고 있는 현실의 가정을 돌아보자.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이 가정은 몇 차례 이혼의 위기를 겪었다. "함께 웃지는 못했어도 함께 울며 서로를 알아갔다"는 두 사람, 작가는 시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남편의 슬픔을 보게 된다. 비로소 같은 것을 느껴도 표현이 다를 수 있다는 이해의 물꼬를 튼 것이다.


이해와 긍정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온벼리 작가는 첫째 새봄이와는 다르게 둘째 아이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서 한 달 동안 지낸다. 그 기간 동안 가사와 새봄이의 돌봄은 남편이 맡는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귀가를 환영하는 남편에게서 수다쟁이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는 끊임없이 쏟아내는 수다를 통해 그간 엄마이자 주부인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상대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와 수용, 진정한 돌봄은 무조건 그것을 전제로 한다.


진정한 돌봄

image.png 새봄과 리즈는 모두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어도 일단은 상대를 긍정한다.


진정한 돌봄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상대를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내 관념 속에서 모든 것이 합치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설혹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더라도 일단은 긍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더 웨일』의 리즈 그랜트(홍 차우)는 정말 영웅 같은 면모를 보이는 캐릭터이다. 일단 찰리를 위생적으로 돌보는 건 육체적으로도 엄청나게 험난한 일이다. 단지 전담 간호사라는 직무의 범위를 넘어서 신뢰와 우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녀는 찰리가 병원에 가고 건강해지길 바란다. 폭식을 그만두길 원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걱정은 하지만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것들만 준비한다.


『윤희에게』에서도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 속에서 새봄이는 엄마가 동성애자란 사실에 그 어떤 거부 반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녀에겐 그저 여전히 닮았으면 하는 예쁜 엄마다. 마사코 역시 자신의 조카 쥰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이좋은 고모와 조카 사이를 유지한다. 결국 이 둘은 오타루에서 윤희와 쥰이 마주하고 지난날의 회한을 푸는 데 결정적인 조력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이 돌봄이 일방적이지는 않다. 윤희는 생각보다 자신의 딸 새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안다. 담배를 피운다는 것,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 등 말이다. 쥰 역시 눈을 치울 때는 연로한 고모를 배려하고, 저녁에는 항상 영업이 끝난 카페를 찾아와 고모와 함께 퇴근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다정함을 온전히 베푸는 데 있어서 그 어떤 강요도 억압도 없다.


『다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에서 작가는 딸과 왈츠를 춘 일화를 소개하는데, 이때 상당한 행복감을 느낀 듯하다. 춤을 추면서 새봄이는 엄마의 발을 제법 밟았다. 하지만 작가는 교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딸과 같이 춤추는 이 순간을 즐길 뿐이다. 그녀는 아마도 발을 밟아대는 춤도 일단은 긍정하는 것, 그것이 가족이 서로를 돌보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믿고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다정한 어른일지도 모른다며 온벼리 작가는 말한다. 『윤희에게』의 새봄과 『더 웨일』의 리즈는 정상성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비틀거리는, 심지어는 주저앉기까지 한 상대를 그 상태 그대로 보살핀다는 점에서 작가의 성찰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결론: 상처를 마주하는 일

리즈의 오빠 앨런은 참혹한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를 지켜봤던 그녀에겐 씻기 힘든 큰 상처였지만, 아픈 기억 속에서도 오빠의 연인 찰리를 알뜰하게 보살폈다. 거식증에 걸려 말라 간 앨런 이후, 폭식증으로 비대해지는 찰리를 지켜보는 일엔 이루 말하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처와 아픔을 투사해 상대를 대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증오할만한 새생명 교회의 선교사를 자처한 토마스도 꽤나 다정하게 상대했다.


윤희는 영화 말미에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아니 어쩌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을 보인다. 그녀의 전 남편인 인호의 재혼을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는 모습,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일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지만 그 기억에 머물지 않는다. 기꺼이 인호를 축하하는 모습에서 방금의 박대가 오히려 배려이고 존중이고, 안타까움이었음이 온전히 드러난다.


이들은 어떻게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을까? 온벼리 작가는 "자기 안의 상처를 알아보고 스스로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이 다정한 어른이라고 말한다. 만약 윤희가 여행을 통해서 쥰을 다시 만나고, 자신을 긍정하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착한 성품의 그녀는 인호의 재혼을 기꺼이 축하했겠지만, 그토록 환한 표정을 짓기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윤희의 딸 새봄이가 준비한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온벼리 작가의 딸 새봄이도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함께 하며 자신의 엄마에게 상처를 마주할 용기를 준 존재일 것이다.


앞서 우리는 거시적 맥락에서 시대의 다급한 요청을 보았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감의 능력"에는 결국 자신의 상처 속에서 스스로의 소수자성을 발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수자로서의 작은 기득권마저 버릴 때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윤희와 찰리처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온벼리 작가가 굳이 우리에게 가족의 상처를 보여 주는 이유는, 이 돌봄의 힘이 그 밖으로 나서길 바라는 소망에 있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도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잇는 연대의 언어"를 복원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일 것이다. 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우리에게도 새로운 봄과 같은 시절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끝으로 휴대폰 케이스의 틈 사이로 스며든 물방울처럼, 자신의 아이가 "삶의 기적"이라는 작가, 그 삶과 상처의 기록, 그것을 마주 보는 용기를 담은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글을 마친다.


다시 한번 이 글은 온벼리... 읍... 읍... 아... 아악!



image.png 윤희에게(2019)
image.png 더 웨일(The Wale, 2022)
image.png 다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2026)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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