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의 자화상: 액자 밖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
작품: 미술관 유리창에 비친 당신의 얼굴
마지막 전시실이다.
지난 열한 번의 밤 동안 물속에 가라앉은 여인과, 이름을 빼앗긴 소녀와, 울음을 해체당한 얼굴과, 황금 장식 속에 매몰된 초상 등 그림 뒤에 있던 잊혀진 마음들을 지나왔다.
그들은 모두 오래 보존되었고, 모두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전시실의 마지막 작품은 액자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 어두운 유리창 앞에 서면 비로소 보이는 그런 그림. 조명이 꺼진 전시장의 검은 표면 위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실루엣. 설명문도 없고, 연대도 없고, 소장처도 없다. 아직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미술관의 마지막 작품이다.
당신.
세상은 오래전부터 인간을 전시 가능한 형태로 다듬어 왔다. 품위, 책임, 역할, 성숙. 이 고상한 단어들은 대개 통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보기에 좋은 표정, 사회적으로 승인된 인내, 불편을 일으키지 않는 슬픔. 사람은 그렇게 서서히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감상에 적합한 이미지로 정리된다.
명화 속 인물들과 우리의 차이는 단 하나다. 그들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아직 수정 가능하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은 흔히 찬양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종료를 뜻한다. 더는 움직일 수 없고, 더는 벗어날 수 없고, 더는 자신을 다시 그릴 수 없다. 반대로 살아 있는 존재의 권력은 결핍이 아니라 가변성에서 나온다.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것. 배치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 누가 붙여놓은 제목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미완성, 아니 미결인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작품은 가장 미숙한 것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탈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 액자의 용도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명화처럼 매끈하지 않다. 빛도 불안정하고 윤곽도 흐리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가치가 있다. 고정된 표면이 아니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원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슨트의 해설은 끝난다.
이후의 문제는 감상이 아니라 선택이다.
계속 걸려 있을 것인가. 타인이 보기 좋게 만든 프레임 안에서, 해석 가능한 표정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출구는 늘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액자보다 정직하다.
액자는 당신을 보존하는 척하면서 정지시키고, 출구는 모든 보장을 거두는 대신 이동을 허락한다.
이 전시실을 지나 우리는 그리고 당신은 잘 보존된 작품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자기 형식을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의 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밤 11시. 미술관의 불이 완전히 꺼진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제자리에 남는다.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리창 앞의 마지막 작품만은 다르다. 그 작품은 뒤를 돌아 문 쪽으로 걸어갈 수 있다. 설명문 밖으로,감상 밖으로, 전시 밖으로. 오늘 밤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이것이면 충분하다.
<11시의 자화상>
미완이 아니라, 미결.
보존이 아니라, 이탈 직전.
Vibbidi Vobbi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