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틈에서 다시 나를 회복해 가는 시간들”
〈신의주의 책방 – 10장〉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던 시절
그 뒤로 나는 도서관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위안이었다.
돈 들이지 않고,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책을 빌려서
마음 가는 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육아맘인 나에게는 기적 같은 자유였다.
손에 잡혀서 빌렸지만
집에서는 도무지 읽히지 않는 책은
흐뭇하게 기간 나 반납했다.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았다.
그렇게 거의 매주,
어떤 주는 이삼일에 한 번씩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의 조용한 공기가
그때의 나에게는 숨 쉴 틈이었다.
화장실에 앉아
아이와 육아에서 아주 잠깐 숨 돌리는 사이에도
책을 손에 쥐고 싶어서
아크릴 고정대까지 사서 화장실 선반에 붙여두었다.
밥 먹는 틈틈이,
임신 초기의 입덧과 피곤함 사이에도,
새벽에 배가 쓰라려 깬 순간에도
한 줄이라도 읽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책을 붙잡았다.
번거롭고 조용하고 바쁜 육아의 틈 사이—
책은 그 시절
내가 내 자신을 잃지 않도록 잡아주는
얇지만 강한 끈 같은 것이었다.
〈신의주의 책방 – 11장〉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결
소설을 펼칠 때
가장 중요한 건 내용도, 작가도, 장르도 아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
**‘읽히느냐 아니냐’**다.
어떤 책은 한 문장을 읽는 데도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둔해지는 반면,
어떤 소설은 페이지가 손가락 사이에서
스르륵 넘어간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읽히는 흐름 안에
내 마음을 천천히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위로를 찾는 독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가슴을 치는 문장에 약하다.
내 인생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서
하산이 수술 후 “다시는 웃지 않았다”는 문장을 만났을 때,
가슴 한가운데를 누군가 손바닥으로 눌러놓은 듯한
묵직한 감정을 느꼈다.
슬픔과 인간의 무게가 그대로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그런 장면들.
그게 나를 오래 붙든다.
대학생 때 초한지와 열국지를 밤새워 읽은 적도 있다.
거대한 세계, 영웅들의 서사,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
하지만 여섯 권, 일곱 권쯤 넘어가면
비슷한 흐름에 질려서 책을 덮었다.
나는 세계관 자체는 좋아하지만
너무 길고 반복되는 이야기는 견디지 못한다.
지루한 묘사는 특히 힘들다.
전 남자친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인생 책이라고
해안 도시에서 그렇게 읽는다고 자랑하길래
나도 도전해 봤다.
하지만 몇 번을 도전해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다시 해볼까?” 하는 마음은 아직 남아 있다.
아마도 그 책의 세계관 자체는 궁금한데
문장이 나와 맞지 않아서일 것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의 삶으로 잠깐 들어가는 느낌을 좋아한다.
현실에서 도망치는 건 아니지만,
조용히 ‘다른 인생을 통과해 보는 경험’이 있다.
내 삶은 그대로인데,
잠깐 다른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느낌.
그게 나를 살아 있게 한다.
그래서일까, 결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해피엔딩이어도, 허무해도, 회색빛이어도 상관없다.
나는 대부분의 줄거리를 금방 잊어버리지만
읽는 동안의 감각은 오래 남는다.
최근에 읽은 살로니카의 아이들은
내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았던 홀로코스트 소설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 무거운 세계를 끝까지 읽어냈다.
그 시절 사람들의 삶과 비극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남았다.
문장 하나, 이야기 한 줄이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
그게 소설이고,
그래서 나는 소설가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어떻게 이렇게 긴 이야기를 완성하지?
읽을 때마다 경외감이 든다.
SF는 아무리 노력해도 읽히지 않는다.
우주는 흥미로운데
세계관과 기술 설명이 많아지면
속이 울렁거리고 집중이 흐트러진다.
영화 ‘인터스텔라’도 보다가 잠들었다.
간호사지만 DNA나 세포의 원리 같은 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상하게도 하리하라가 쓴 ‘엄마 생물학’은
너무 재미있었는데,
그건 아마 ‘삶과 연결된 과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국
이야기 속 인간을 보는 독자다.
상처 입은 사람들,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윤리와 죄책감, 사랑과 폭력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들.
그런 것들이 담긴 소설이
나를 조용히 흔들고 다시 살아 있게 한다.
〈신의주의 책방 – 12장〉
좋은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
요즘 들어
집에 대한 생각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20대 때는
‘한강뷰’, ‘넓은 평수’, ‘멋진 인테리어’를 꿈꾸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삶,
여유로움과 근사함이 느껴지는 그 이미지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30대의 나는
다른 기준을 갖게 되었다.
어린이집이 가깝고,
도서관이 걸어서 닿을 곳에 있고,
작은 공원과 놀이터가 함께 있는 동네.
차량 통행이 적고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골목이 많은 곳.
요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그런 공간이다.
집의 뷰보다
집에서 나가서 어디까지 걸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고,
집의 크기보다
아이와 내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동선이 더 중요해졌다.
차 한 대가 갑자기 튀어나올까 긴장하며 걷는 길보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유모차가 흔들림 없이 지나가는 길이 좋은 집이다.
그런 동네를 걸을 때면
내가 아이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볍게, 자연스럽게 실감난다.
그리고 그 변화가
나는 싫지 않다.
도서관과 어린이집과 놀이터 사이에 있는 집.
내가 좋아하는 소설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한 삶이 만들어지는 곳.
이제는 그런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한다.
〈신의주의 책방 – 13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우리 집이 어려웠던 어느 시절,
아빠는 내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고
처음에 뭐라고 썼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단 한 문장만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해라.”
아빠가 나에게 해준 말 중에
아마 가장 따뜻하고 현실적인 조언이었을 것이다.
이 문장은 때로는 나를 붙잡아주고
때로는 나를 격려하고
어떤 때는 그냥 가만히 삶의 옆에 있어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차오르고
더 잘해드리고 싶고
그냥 보고 싶은 우리 아빠.
막상 만나면
아빠 돈으로 갈비 먹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나.
고등학생 때 카풀에서도 영단어책을 손에 쥐고 있던 전교 2등 옆에서 경쟁심과 압박감을 느꼈던 나는 가끔 주말야자 끝나고 아빠 차가 주차 돼 있으면
그냥 그 차만 봐도 마음이 놓였던 시절.
그 차를 타고 집까지 40분 정도 달리던 그 길에서 느끼던 안락함과 편안함. 잠깐의 휴식.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시간이었고
아빠와 있는 공간은 늘 그렇듯 조용히 나를 보호해 줬다.
부모가 되고 보니
그때의 기억들이 더 또렷해지고
더 벅차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아이에게 안전한 길을 만들어주고 싶고
아이에게 편안한 집을 주고 싶고
아이에게 ‘다녀오면 아빠 차가 있는 학교 앞처럼’
마음 놓이는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아빠가 나에게 했던 말처럼
나도 결국
할 수 있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해보려 한다.
그렇게 쌓아 올리는 하루하루가
결국 가장 단단한 삶이 된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시 나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1막을 정리하고, 천천히 다음 장을 펼치려 한다. 내 힘과 시간으로 읽어낸 모든 문장들이 앞으로의 나를 더 멀리 데려가줄 거라 믿는다."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