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생각의 시장: 모든 것이 만나는 곳

제2부: 거대한 분리: 이성의 왕좌, 감응의 추방

by 한재영

제3장 광장의 소음, 영혼의 질문


2절. 아고라, 생각의 시장: 모든 것이 만나는 곳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오늘날 터키의 서부 해안)에서 가장 번화하고 부유했던 항구 도시 밀레토스. 변화의 무대는 더 이상 도시 가장 높은 곳, 산꼭대기 아크로폴리스에 자리 잡은 웅장하고 신성한 신전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뜨거운 심장은 에게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번잡한 항구 근처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탁 트인 공간, 바로 아고라(agora), 즉 광장이었다.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 아래, 아고라는 온갖 소리와 냄새, 움직임으로 들끓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짐을 내리는 인부들의 거친 함성, 값을 흥정하는 상인들의 날카로운 외침, 최신 정치 소식을 전하며 열변을 토하는 연설가의 목소리, 광장 한쪽에서 울려 퍼지는 음유시인의 리라 소리, 짐을 실은 당나귀의 신경질적인 울음소리와 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 그리고 인근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고 두드리는 규칙적인 망치 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하고 혼란스러우며 활기찬 소음처럼 뒤섞여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었다. 이곳은 당대 알려진 세계의 모든 것이 만나고, 부딪치고, 경쟁하고, 뒤섞이는 문명의 거대한 용광로였다.

이오니아 본토에서 온 상인은 이집트에서 힘들게 들여온 최고급 아마포와 파피루스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고, 그 옆에서는 검게 그을린 페니키아 뱃사람이 레바논의 깊은 숲에서 베어 온 백향목에서 풍기는 짙은 향기와, 티레의 비밀스러운 장인들이 달팽이 껍질에서 뽑아낸 값비싼 자줏빛 염료의 영롱함을 뽐냈다. 시칠리아의 비옥한 평야에서 온 곡물과 흑해 연안에서 잡아 말린 염장 생선이 거래되었고, 북방의 스키타이 초원에서 야생마처럼 끌려온 날렵한 궁수 노예와 트라키아 산악 지대 출신의 건장한 용병들이 더 나은 몸값을 받기 위해 흥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지 물건만 교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는, 그들은 ‘생각’을 교환하고, ‘의견’을 충돌시키며, ‘이야기’를 거래했다. 크레타 섬에서 온 늙은 상인은 어린 시절 들었던, 반인반우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던 라비린토스 미궁의 신화를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했고, 동방의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백전노장은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의 신 아흐리만이 벌이는 우주적인 선악의 투쟁에 대해 열띤 목소리로 논했다. 이집트를 여행하고 돌아온 호기심 많은 학자는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의 신화와 자신들의 포도주와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 신화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는 사실에 대해, 어쩌면 두 신이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대담한 가설을 펼쳤다.

바빌로니아의 신비로운 도시에서 점성술의 비밀을 배우고 온 상인은 밤하늘의 별들의 움직임이 인간 개개인의 운명, 심지어 도시 국가의 흥망성쇠까지 결정한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주었다. 부유한 리디아 왕국에서 온 상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동그란 금속 조각, 즉 주화를 보여주며 이제 모든 물건과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고 교환할 수 있는 편리하고 합리적인 시대가 열렸다고 자랑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2장에서 동굴 벽에 신성하게 새겨졌던 단단하고 유일했던 신화의 절대적 권위에 첫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굴 속에서 부족 전체의 유일한 세계관이자 삶의 나침반이었던 ‘조상님의 별’ 이야기는, 이제 아고라의 번잡한 좌판 위에 올라온 여러 지역의 특산품 중 하나처럼,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하늘 신 제우스가 진짜 세상의 통치자라면, 저 페니키아 상인이 믿는 폭풍의 신 바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위대한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진리라면, 저 이집트 상인이 말하는 태양 신 라의 모험은 왜 저토록 다른가? 그리고 왜 저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우리의 이야기보다 더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일까? 혹시 우리 조상들이 틀렸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은 같은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진실 자체는 대체 무엇일까?’

신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할 신성한 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교와 평가, 심지어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충돌하는 이 지적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전에 없던 새로운 지적 자유를 맛보기 시작했다.

바로 이 혼란과 자유의 한복판에, 밀레토스의 한 현명하고 부유한 남자, 탈레스가 등장한다. 그는 이집트를 여러 차례 여행하며 그곳의 발달된 기하학과 천문학 지식을 배워온, 실용적인 감각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그는 '철학은 밥벌이가 안 된다'는 비웃음에 보란 듯이, 별을 관측해 올리브 풍작을 예측하고 착유기를 독점해 거금을 벌어들인 수완 좋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또한 일식(日蝕) 날짜를 정확히 예언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막대기 하나로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해내는 기하학의 대가였다.

그는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신들의 변덕스럽고 때로는 비도덕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떻게 바람둥이 제우스가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 신들이 우주의 조화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 모든 혼란스러운 현상들 너머에, 이 모든 서로 다른 이야기들 너머에, 감정이나 변덕이 아닌, 영원히 변치 않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느 날, 그는 밀레토스 항구 근처를 유유히 흘러 에게해로 흘러 들어가는 메안데르 강의 하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은 상류에서부터 끊임없이 비옥한 흙을 실어와 강 하구에 퇴적시키며 조금씩 새로운 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마른 씨앗은 물을 만나야 비로소 싹을 틔운다. 물은 비가 되어 하늘에서 내리고, 안개가 되어 공기 중에 존재하며, 얼음이 되어 단단한 고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혹시…?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이 짧고 단순한 선언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문장 중 하나였다. 이 주장이 과학적으로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 이 주장이 혁명적이었던 진짜 이유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근원을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자연물’로 설명하려는 대담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믿음이나 계시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관찰과 이성적 추론, 그리고 검증의 문제였다.

탈레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신께서 노하신다!”라고 저주하며 돌을 던지는 대신,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탈레스 선생님. 하지만 만약 모든 것이 물이라면, 저 타오르는 불은 어떻게 물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 아닙니까?”라고 논리적인 반론을 제기하고 함께 토론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화에서 철학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도약, 즉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이성’에 대한 탐구로의 전환이었다.

탈레스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아낙시만드로스는 스승의 위대한 통찰을 존경하면서도, 그 이론이 가진 한계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는 스승의 반대자들처럼, 만약 세계의 근원이 물이라면, 어떻게 그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불이나 건조한 흙이 존재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만물의 근원 물질이 물이나 불, 공기, 흙과 같은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한 요소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다시 돌아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특정한 성질도 없지만 무한하고 영원한 어떤 존재, 즉 ‘아페이론(apeiron, 무한정자(無限定者))’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승 탈레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더욱 놀라운 지적 도약이었다. 탈레스가 관찰 가능한 자연물에서 근원을 찾았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순수한 이성적 추론을 통해 감각 너머의 추상적인 원리를 상상해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성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이것은 훗날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이어지는 서양 형이상학의 씨앗이었다.

그들의 시도는 오늘날 과학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고 명백히 틀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놓은 ‘답’이 아니라, 그들이 시작한 ‘질문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즉, “이 세계는 궁극적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 “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현상들 너머에 숨어있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단 하나의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것이 바로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자, 모든 학문의 어머니인 ‘형이상학(Metaphysics)’의 탄생이었다. 인류는 마침내 신들의 드라마가 아닌, 세계 자체의 비밀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질문의 방식은 아직 완성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신전의 제단 위에서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고라의 먼지 날리는 바닥 위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고 깨지며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이었다. 진리는 더 이상 사제의 입에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목소리 사이의 끝없는 논쟁 속에서 시험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은 필연적으로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된다. 닫힌 성소가 아니라, 열려 있는 광장.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소음과 질문이 끊임없이 서로를 시험하는 공간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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