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연애방정식-4

제4화. 취중진담과 흑기사의 등장

by 지그프리드

○ 시놉시스: "칼 대신 서류를 든 셰프"

동생 연호가 입사 직전 거액의 사기를 당해 잠적하자, 연우는 동생의 빚을 갚고 그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호텔 셰프 자리를 포기합니다.

남장을 하고 성운그룹 전략기획팀에 입사한 그녀.

하지만 하필 그녀의 상사인 태준은 매일 점심 메뉴의 염도까지 체크하는 까다로운 미식가입니다.

사고 친동생을 대신하기 위한 여주인공의 고군분투기입니다.


○ 등장인물

- 한연우(26세) : 촉망받던 천재 수 셰프(Sous Chef).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기 직전이었으나, 사라진 남동생 연호의 사고를 수습하고 그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직서를 던집니다. 칼을 잡던 손으로 이제는 볼펜을 잡고 성운그룹 신입사원으로 잠입합니다.

- 강태준(32세) : 성운그룹 본부장이자, 미식가들 사이에서 '악마의 혀'라 불리는 완벽주의자. 정체를 숨긴 재벌 3세로, 스트레스를 요리로 푸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습니다.

- 한연호(26세) : 한연우의 쌍둥이 남동생, 어릴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닌 사고뭉치입니다.




제4화. 취중진담과 흑기사의 등장


전략기획팀의 신입사원 환영회 장소는 회사 근처의 소란스러운 고깃집이었다.

평소라면 셰프의 감각으로 고기의 질이나 굽기 정도를 따졌을 연우였지만, 지금 그럴 여유는 전혀 없었다.


"자, 우리 본부장님의 '럭키 보이' 한연호! 한 잔 받아야지?"


박 대리가 비꼬는 말투로 소주잔을 가득 채웠다.

오 대리가 퍼뜨린 탕비실 소문은 이미 팀 내에서 '본부장님의 숨겨진 친인척설' 혹은 '사촌 동생설'로 변질되어 있었다.


"연호 씨, 솔직히 말해봐. 본부장님이랑 사촌 형제지? 아니면 회장님 댁이랑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정말 그 소문대로 '특별한' 사이인 거야? 본부장님이 자기 재킷까지 벗어주는 건 성운그룹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연우는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 아닙니다. 그냥... 제가 커피를 운 좋게 잘 타서 예뻐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에이, 싱겁긴! 자, 마셔 마셔!"


평소 주방에서 일할 때 도수가 높은 요리용 술은 다뤄봤지만, 연우는 의외로 알코올에 약했다.

하지만 거절하면 의심이 더 커질까 봐 연우는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


소주 세 병이 비워질 때쯤, 연우의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얼굴은 발그레해졌고, 평소의 날카로운 셰프 눈빛은 사라진 채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본부장님... 그 인간은요... 진짜 예민한 거예요. 커피 온도 1도만 틀려도 귀신같이 안다니까요..."


취기가 오른 연우가 혀 짧은 소리를 내뱉자, 박 대리가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 다가왔다.


"그래? 그럼 그 예민한 본부장이 너한테만 왜 그렇게 잘해주는데? 야, 너 솔직히 말해. 너 여자 아니지? 혹시... 아니, 너 정체가 뭐야?"


박 대리가 연우의 어깨를 툭 치며 압박해 올 때였다.

고깃집 문이 열리며 찬 바람과 함께 압도적인 아우라가 들이닥쳤다.


"내 정체가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박 대리."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시끌벅적하던 회식 자리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완벽한 수트 차림의 태준이 그곳에 서 있었다.

회식에는 절대 참석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나타나자 팀원들은 혼비백산하며 일어났다.


태준의 시선은 곧장 정신을 못 차리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려 하는 연우에게 향했다.

태준은 성큼성큼 다가와 연우의 앞잔에 가득 찬 술을 대신 집어 들어 단숨에 비워버렸다.


"본부장님! 여긴 어쩐 일로..."


팀장이 당황하며 묻자, 태준은 차갑게 응수했다.


"내 전담 비서(?)가 여기서 고문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신입사원 환영회라더니, 압박 면접 중이었나?"


태준은 비틀거리는 연우의 허리를 단단히 팔로 감아 부축했다.

얇은 재킷 너머로 느껴지는 연우의 뜨거운 체온에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술에 취해 흐트러진 연우는 태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음... 본부장님... 커피... 85도... 딱 맞췄는데..."


태준은 연우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겨주며 팀원들을 향해 선언했다.


"앞으로 한연호 씨한테 개인적인 질문은 금지한다. 친척도, 사촌도 아니야. 다만, 내가 가장 신뢰하는 내 사람일 뿐이다. 불만 있는 사람은 내 방으로 직접 오도록."


태준은 연우를 거의 안다시피 해서 고깃집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닿자 연우가 태준의 목을 꼭 껴안으며 잠꼬대를 했다.


"셰프... 셰프라고 부르지 마요... 나 지금... 회사원... 한연호란 말이야..."


연우의 젖은 목소리가 태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태준은 자신의 목을 감싼 연우의 작은 손과,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가냘픈 체구를 느끼며 확신했다.

이 신입사원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든, 이미 자신의 마음은 그 비밀 속으로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것을.


고깃집의 소음이 멀어지고 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태준은 비틀거리는 연우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연우는 술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해 자꾸만 태준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떨궜다.


"한연호 씨, 정신 차려. 주소 어디야?"

"어... 종로... 아니, 주방... 냉장고 옆에요..."


연우는 완전히 셰프 모드로 돌아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태준은 헛웃음을 삼키며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하필 회식 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라 빈 택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본부장님... 근데요... 넥타이 너무 꽉 맸어요. 이거... 답답해..."


연우가 갑자기 자신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더니, 급기야 셔츠 단추를 하나 풀려고 손을 가져갔다.

셔츠 안쪽에는 단단히 동여맨 압박붕대가 숨겨져 있었다.


"이봐, 길바닥에서 뭐 하는 거야!"


태준이 황급히 연우의 두 손을 낚아채 결박하듯 잡았다.

연우의 가느다란 손목이 태준의 큰 손안에 쏙 들어왔다.

연우는 반항하듯 몸을 비틀다 태준의 품으로 확 쏠렸다.

태준의 코끝에 연우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은한 로즈메리 향과 달큼한 소주 냄새가 뒤섞여 끼어들었다.


"셰프가... 왜 회사에 있어요? 나... 고기 굽기 맘에 안 들어요... 본부장님한테... 맛있는 거 해주고 싶은데..."


연우의 젖은 눈동자가 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술에 취해 필터 없이 튀어나오는 진심. 태준은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남자치고는 너무 위험해.'


마침내 빈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태준은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고 연우를 밀어 넣었다.

그런데 연우가 태준의 옷소매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지 마요... 커피... 더 맛있게 타줄게..."


연우의 힘없는 손길에 태준은 결국 상체를 차 안으로 깊숙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좁은 택시 안, 가로등 불빛이 번갈아 스치는 찰나의 순간. 태준의 얼굴과 연우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연우의 셔츠 깃이 벌어지며 그 안의 하얀 붕대 자락이 살짝 비쳤다.

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운동용 보정 기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꼼꼼하게 감긴 하얀 천.


"한연호, 너 도대체..."


태준이 확인하려는 듯 손을 뻗으려던 그때,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두 사람을 힐끗 보며 재촉했다.


"아니, 갈 거요 말 거요? 뒤에 차 밀리는데!"


태준은 아쉬운 듯 연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5만 원권 한 장을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이 친구, 종로구 XX동 앞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십시오. 도착하면 제 번호로 문자 한 통 주시고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택시 문이 닫히고, 차는 멀어져 갔다. 태준은 빈 택시 승강장에 홀로 서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연우의 손목을 잡았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태준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어젯밤 오 대리가 찍어 올린 '탕비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 젖은 셔츠 사이로 보였던 그 기묘한 실루엣을 떠올렸다.


"보정용 붕대라... 셰프의 감각에, 남자의 골격이라기엔 지나치게 유연한 몸이라니."


태준은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신입사원 한연호, 인사기록 카드 다시 가져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까지 전부 다."


본부장의 본격적인 추적과 의심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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