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숙취의 아침, 조각난 기억의 퍼즐
○ 시놉시스: "칼 대신 서류를 든 셰프"
동생 연호가 입사 직전 거액의 사기를 당해 잠적하자, 연우는 동생의 빚을 갚고 그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호텔 셰프 자리를 포기합니다.
남장을 하고 성운그룹 전략기획팀에 입사한 그녀.
하지만 하필 그녀의 상사인 태준은 매일 점심 메뉴의 염도까지 체크하는 까다로운 미식가입니다.
사고 친동생을 대신하기 위한 여주인공의 고군분투기입니다.
○ 등장인물
- 한연우(26세) : 촉망받던 천재 수 셰프(Sous Chef).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기 직전이었으나, 사라진 남동생 연호의 사고를 수습하고 그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직서를 던집니다. 칼을 잡던 손으로 이제는 볼펜을 잡고 성운그룹 신입사원으로 잠입합니다
- 강태준(32세) : 성운그룹 본부장이자, 미식가들 사이에서 '악마의 혀'라 불리는 완벽주의자. 정체를 숨긴 재벌 3세로, 스트레스를 요리로 푸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습니다.
- 한연오(26세) : 한연우의 쌍둥이 남동생, 어릴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닌 사고뭉치입니다.
제5화. 숙취의 아침, 조각난 기억의 퍼즐
햇살이 커튼 사이로 사정없이 들이닥쳤습니다.
연우는 깨질 듯한 두통에 신음하며 눈을 떴습니다.
입안은 모래라도 씹은 듯 서글거렸고, 천장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죠.
"으으... 내 머리..."
머리를 싸매고 몸을 일으키려던 연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 몸을 확인했습니다.
다행히 옷은 어제 입었던 남동생의 셔츠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넥타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죠.
"기억해내야 해, 한연우. 어제 고깃집에서... 박 대리가 술을 줬고... 그다음에..."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하나둘 머릿속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조각: 누군가 내 술잔을 뺏어 들고 단숨에 비우던 단단한 손등.
두 번째 조각: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나를 지탱해 주던 묵직한 가슴팍과 코끝을 간지럽히던 우디 향.
세 번째 조각(치명상): 택시 안에서 내가 누군가의 옷소매를 잡고 "가지 마요, 커피... 더 맛있게 타줄게..."라고 웅얼거렸던 목소리.
"미쳤어! 미쳤나 봐, 한연우!!"
연우는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 목소리와 향기의 주인은 확실했습니다. 강태준 본부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냉철하다는 그 남자 앞에서 주정이라니! 심지어 셰프 본능이 튀어나와 '맛있게 해 준다'는 말까지 내뱉다니!
침대 옆 의자를 본 연우의 눈이 더 크게 떠졌습니다.
어제 자신이 입고 갔던 저렴한 슈트 재킷이 아니라,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태준의 재킷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재킷 안감을 살피던 연우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KANG TAE JUN] 금사실로 수놓아진 그의 이름 석 자.
"이게 왜 여기 있어? 아니, 설마 내가 뺏어 입고 온 거야? 본부장님은 셔츠 바람으로 보내고?"
더 큰 문제는 어제의 기억 중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젖은 셔츠 때문에 가슴을 가리며 당황했던 탕비실의 기억, 그리고 술에 취해 넥타이를 풀어헤치려던 자신의 손길...
'본부장님이... 내 압박붕대를 본 걸까? 아니야, 봤으면 벌써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겠지.'
연우는 서둘러 찬물로 세수를 하고 압박붕대를 평소보다 더 꽉 조였습니다.
숙취 해소 음료를 두 병이나 들이켰지만, 떨리는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연우에게 꽂히는 기분이었습니다.
탕비실 사건에 이어 어제 본부장의 '공개 선언'까지 더해졌으니, 이미 사내 게시판에는 [신입사원 한연호, 본부장의 성역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전략기획팀 사무실 입구에 서자 박 대리와 오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 연우를 쳐다봤습니다.
"어이, 한연호 씨. 어제 본부장님 차 타고 잘 들어갔나?"
박 대리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연우는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아... 택시 타고 갔습니다. 본부장님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송하면, 85도 맞춰서 내 방으로 오지. 5분 준다."
태준이었습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완벽한 슈트 차림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지만, 연우를 스쳐 지나가는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깊고 복잡했습니다.
연우는 태준의 재킷이 든 쇼핑백을 꽉 쥐었습니다.
오늘, 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연우는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연우는 본부장실 문 앞에서 심호흡을 열 번도 넘게 했습니다.
손에 든 쇼핑백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85도의 온도를 정확히 맞춘 커피와, 어젯밤의 증거물인 태준의 재킷. 이건 사직서보다 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들어와."
노크 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들려온 태준의 목소리에 연우는 어깨를 움츠리며 문을 열었습니다.
태준은 커다란 통유리 창을 등지고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창밖의 아침 햇살이 그의 차가운 옆얼굴을 비추자, 연우는 어젯밤 그 품에서 났던 우디 향이 코끝에 스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 본부장님,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커피 여기 두겠습니다."
연우는 조심스럽게 커피를 내려놓고, 재킷이 든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재킷,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깨끗하게 세탁해서 가져와야 하는데, 도저히 시간이..."
"됐어. 어차피 같은 거 많으니까."
태준이 서류를 덮고 의자를 돌려 연우를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연우의 목덜미부터 천천히 올라와 눈동자에 멈췄습니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0.5초의 정적...
"기억은 좀 나나? 어제 자네가 내 목을 안고 무슨 말을 했는지."
태준의 직구에 연우의 멘털이 바스러졌습니다.
"아... 그게... 제가 술을 마시면 개가... 아니, 다른 사람이 되는 버릇이 있어서요.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납니다!"
"그래? 그럼 내가 기억나게 해 주지."
태준이 천천히 일어나 연우에게 다가왔습니다.
넓은 어깨가 시야를 꽉 채우자 연우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이내 소파 끝에 걸려 멈춰 섰습니다. 태준은 연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상체를 숙였습니다.
"커피보다 더 맛있는 걸 해준다고 했어. 본부장님한테만."
"그... 그건...!"
"그리고, 어제 택시 안에서... 자네 셔츠 안쪽을 봤어."
연우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태준의 시선이 연우의 셔츠 단추 부근에 머물렀습니다.
"보정용 붕대라고 했지? 그런데 한연호 씨, 내가 아는 운동선수들은 허리가 아파도 그렇게 가슴 윗부분까지 붕대를 칭칭 감지는 않아. 마치... 뭔가를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사람처럼 말이야."
태준이 갑자기 연우의 오른손을 확 채어 들었습니다.
연우가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태준의 힘은 완강했습니다. 그는 연우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엄지로 훑었습니다.
"이 손, 아무리 봐도 사무직의 손이 아니야. 칼을 쥐는 법을 아는 손이지. 그리고 향기... 자네한테선 남자들의 스킨 냄새가 아니라, 싱그러운 채소와 허브 향이 나."
태준의 얼굴이 연우의 귓가에 가까워졌습니다.
뜨거운 숨결이 닿자 연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한연호. 아니, 너 누구야? 내 팀에 들어온 이 가짜 신입사원의 진짜 정체가 뭐지?"
연우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이대로 정체가 탄로 나는 걸까요?
동생 연호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걸까요? 연우의 머릿속이 하얘진 그때, 태준의 입술이 연우의 귓가에서 나직하게 울렸습니다.
"대답해. 지금 여기서 네 옷을 직접 확인하게 만들지 말고."
연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본부장님... 그게... 사실은..."
태준의 서늘한 질문이 공중을 갈랐습니다.
옷을 확인하겠다는 그의 단호한 태도에 연우의 뇌세포들이 비명을 지르며 풀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연우는 떨리는 눈동자를 가다듬고, 천천히 태준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우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뚝 떨어뜨린 채, 셔츠의 가장 윗단추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정말로 여기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그의 눈에 긴장감이 서렸습니다.
하지만 연우가 보여준 것은 셔츠 깃 너머로 살짝 비치는, 쇄골 부근까지 올라온 하얀 압박붕대의 끝자락이었습니다.
"어릴 적에... 주방에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연우의 목소리에 물기가 맺혔습니다. 이것은 절반의 진실이었습니다.
셰프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실제로 뜨거운 소스 냄비가 쏟아져 쇄골 아래에 큰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슴부터 배 쪽까지 깊은 화상을 입었습니다. 흉터가 워낙 흉측해서... 붕대를 감지 않으면 살이 부딪히는 통증도 심하고, 무엇보다 남들한테 보여주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서요."
연우는 단추를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놓았습니다.
"본부장님이 의심하시는 그런 비밀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괴물 같은 흉터를 숨기고 싶어 하는 한심한 놈일 뿐입니다. 어제 넥타이를 풀려고 했던 것도, 술기운에 화상 부위가 화끈거려서 그랬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연우의 눈에서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태준의 재킷 소매 위로 번졌습니다.
셰프로서 가졌던 자부심의 상처를 '수치스러운 흉터'로 둔갑시킨 비참한 연기였지만, 그 절실함만큼은 태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태준은 얼어붙었습니다. 압박붕대를 정체의 증거로 몰아붙였던 자신의 행동이, 한 청년의 아픈 상처를 난도질한 짓이 된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습니다.
"한연호,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태준의 손이 연우의 어깨 위에서 방황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습니다.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고, 당황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이었습니다.
"미안하군. 내가 너무 예민했어. 자네의 개인적인 아픔을 들춰내려던 의도는 아니었네."
연우는 속으로 '살았다!'를 외쳤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상처받은 소년처럼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태준은 그런 연우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가서 쉬어. 오늘 오전 업무는 면제해 주지. 그리고..."
태준은 책상 서랍을 열어 고급스러운 연고 하나를 꺼내 연우에게 내밀었습니다.
"해외 출장 갔을 때 받은 피부 재생 연고야. 흉터에 좋다고 하더군. 자네한테 필요할 것 같아."
연우는 얼떨결에 연고를 받아 들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태준의 눈빛은 이제 의심이 아니라 묘한 보호 본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본부장님, 저기... 그럼 제 정체에 대해서는 이제..."
"잊어버려. 자네가 누구든, 성운그룹의 사원이고 내 사람이라는 건 변함없으니까. 앞으로는 붕대가 답답하면 언제든 내 방에 와서 쉬어도 좋아. 여긴 아무도 안 들어오니까."
연우는 본부장실을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태준의 눈빛이 예전보다 훨씬 더 따뜻해졌기 때문입니다.
화상 흉터라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로 인해 태준이 보여주는 '특별한 배려'는 연우를 더 아슬아슬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