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부자의 죽음, 그리고 리바이어던의 게으른 잠에 대한 고발
연속적인 경제에 대한 글을 쓰고 다른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네이버 뉴스는 나의 마음을 또 흔들었다.
어제저녁 용인, 낯선 건물 주위에서 40대 가장과 장애 아들이 탄 차는 2시간을 맴돌았다. 세상은 이 시간을 '죽음에 대한 망설임'이라 기록하지만, 나는 이를 '고립의 확인 사살'이라 읽는다.
그 좁은 차 안에서 아버지는 뼈저리게 확인했을 것이다. 탐욕스러운 자본이 덫을 놓은 이 정글에서, 만신창이가 된 자신과 병든 아들을 받아줄 사회적 활주로는 단 한 뼘도 남아있지 않음을.
그가 주머니에 남긴 차 열쇠는 유류품이 아니다. "국가와 자본이 우리를 사냥했다"는 서늘한 증거물이다.
나는 지난 11월 처음으로 한국 주식을 통해 400만 원을 벌었다가 최종적으로 700만 원을 잃고 그 과정 속에서 한국장의 시스템이 어떻게 개미를 죽이고 있는지를 관측했고 결국 모든 한국 주식을 버리고 다시 미국장으로 돌아갔다.
벼랑 끝에 몰린 것은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개인이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된 금융의 알고리즘 속으로, 구명조끼 하나 없이 맨몸으로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 2시간의 침묵은 자살을 선택한 시간이 아니었다. 시스템에 의해 타살당함을 선고받은, 집행 유예의 시간이었다.
누가 그를 옥상으로 밀어 올렸는가? 뿔 달린 악마가 아니다. 책상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리는 관료들의 '행정 편의주의(Administrative Convenience)'다.
국가는 왜 기울어진 도살장 같은 주식 시장을 방치하는가?
답은 잔인하게도 '편하기 때문'이다. 사기꾼을 잡고 공정한 룰을 만드는 일은 고단하고 비용이 든다. 반면, 판을 벌려놓고 개미들이 공포와 탐욕에 질려 거래를 반복하게(Churning) 내버려 두면, 국가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증권거래세'를 챙길 수 있다.
국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도박판일수록 국가의 세수 확보는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이 차가운 효율성 앞에서, 한 가정의 파멸은 '비용 처리'되었고, 9살 아이의 생명은 세수 증대를 위한 '부수적 피해'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경고한 '무사유'의 죄악이자, 국가가 저지른 살인이다.
이 게으른 편의주의는 세금 징수의 현장에서 가장 악랄한 이빨을 드러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의 월급은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원천징수'로 뜯어간다. 징수가 쉽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통제와 징수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그러나 수조 원을 굴리는 기관과 기업에게는 어떠한가?
국가는 그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어버이다.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려도 즉시 세금을 걷지 않는다. 온갖 비용을 털어내고, 수익을 확정 짓고, 회계적으로 가장 유리한 시점에 낼 수 있도록 '시간'을 선물한다.
약자에게는 시간을 뺏어 즉시 징수하고, 강자에게는 시간을 주어 과세를 유예하는 이 악랄한 시간차.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은 시간을 지배함으로써 노동을 착취하는데, 국가는 그 착취에 '세법'이라는 면죄부를 발행해 준 공범이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이 불공정한 시간의 규칙에 질식사한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가 시스템 유지를 위해 잉여 인간을 '폐기물(Wasted Lives)' 취급한다고 했다. 이 비극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정확히 국가에 의해 '폐기'되었다.
국가가 부가가치세(VAT)를 걷는 방식을 보라. 우리는 밥을 먹고, 기름을 넣고, 아이의 기저귀를 사는 그 절박한 '생존의 순간'마다 세금을 낸다.
국가는 징수의 편의를 위해 기업을 대리인으로 세우고, 실제 고통은 소비자에게 전가(Tax Shifting)시켰다. 기업은 물건을 팔아 '이윤(탐욕)'을 챙기는데, 왜 세금의 멍에는 '소비(생존)'를 하는 서민이 져야 하는가?
강자는 이익만 챙기고 약자는 비용만 지불하는 이 구조는, 롤스가 말한 '정의'를 완벽하게 전복시킨 야만이다. 기업이 이토록 손쉽게 약자의 주머니를 터는 동안, 국가는 방관했고 아버지의 주머니엔 희망 대신 차가운 차 열쇠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넘어, 이 시스템의 심장을 겨누는 근본적인 혁명을 요구한다. 감상적인 위로가 아닌, 돈의 흐름과 책임의 주체를 뒤바꾸는 '조세 정의의 전복'만이 제2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
* 첫째, 기관의 금융 도박에 '실시간 원천징수'를 도입하라.
노동자의 유리지갑을 터는 그 신속함으로 자본의 금고를 털어라. 기관이 이익을 실현하는 즉시 세금을 걷어, 자본이 독점하던 시간적 특권을 박탈하라. 그것이 헌법이 말하는 평등이다.
* 둘째, 부가가치세를 기업이 직접 토해내게 하라.
소비자에게 세금을 떠넘기는 비겁한 구조를 금지하라. 물건을 팔아 이득을 본 기업이, 그 매출 안에서 세금을 감당해야 한다. 가격 인상으로 전가하려 한다면? 그것을 감시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진짜 '일'이다. 행정이 불편해져야 국민이 산다.
* 셋째, 사내유보금 강제 환수 및 구명조끼 마련.
기업이 쌓아둔 유보금은 사회의 피다. 이 잉여 자본에 징벌적 과세를 매겨, 자본의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구제 기금으로 환원시켜라.
다시, 용인의 그 2시간을 기억하자. 만약 국가가 '징수의 편리함' 대신 약자의 고통을 먼저 살피는 '불편한 행정'을 택했다면, 아버지는 그 차가운 옥상이 아니라 집으로 차를 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삶을 비관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편하게 통치하겠다"는 국가의 오만과 게으름이 그를 밀어버린 것이다.
국가는 이제 그 편안한 의자에서 내려와야 한다. 자본의 멱살을 잡고 세금을 걷는 일이 고단하고 귀찮더라도, 기꺼이 그 수고로움을 감당하라. 행정이 불편해질 때, 비로소 국민은 안전해진다. 그 불편함을 감당하는 것만이, 당신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