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여름
여름이는 예술중학교에 합격했고, 다시 한번 입시를 치러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서인도 더 이상 ‘참고 다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이, 여름이의 숨통을 더 조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자퇴서를 쓰러 가는 날은, 스승의 날 바로 다음 날이었다. 차 안에서 여름이는 담임선생님께 드릴 카네이션을 사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서인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서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창밖 나무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담임선생님은 힘들어하는 여름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의 잦은 조퇴와 결석은 분명 그를 성가시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학교 다니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느냐고, 웅크리듯 앉아 있는 서인에게 담임은 말했었다. 학교를 그만두라는 건가요?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드디어 여름이가, 이제는 더 교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결심해 놓고, 이제는 그저 알리는 일만 남은 사람처럼, 담담한 목소리엔 단호함이 배어있었다. 서인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담임 선생님에게 휴학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건, 쉽지 않습니다, 라는 짧고 건조한 한마디뿐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서인은 여름이의 다른 반 친구가 휴학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는 숙려제도가 한 학기에 최대 7주나 된다는 사실도 그 뒤에야 알았다. 숙려제와 체험학습을 쓰며 어찌어찌 버텼다고 해서 여름이가 자퇴를 안 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때 여름이에게 그런 제도를 제안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최소한의 선택권조차 주지 않은 학교가, 정말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미 결정하신 사항이니 빨리 사인할게요, 미술부장은 학교 일이 전부 자기 몫인양 바쁜 체를 하며, 자퇴서에 휘리릭, 사인을 했다. 고개를 까딱이고 돌아서던 그는, 중요한 것이 떠오른 듯 멈춰 섰다. 미술은 계속해! 여름이의 등 뒤에 대고, 쾌활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왜, 왜 미술을 해야 하는데, 지금 그딴 미술이 뭐가 중요해, 서인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 목을 옥죄었다. 한 번도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 심정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데, 그에겐 한 장의 서류일 뿐이었다.
실기실로 올라가 남은 짐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그동안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남겨둔 그림들, 수채화 키트를 비롯해 동양화 재료들까지, 제법 많았다. 서인과 여름이는 그것들을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던 서인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볼일 없어진 학교는 명성에 비해 평범한 모습이었다. 흰색의 외벽에는 50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예비 소집일, 합격한 화실 친구들과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폴짝폴짝 뛰며 사진을 찍던 여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공연보다도 멋들어진 입학식 행사, 교복을 입은 여름이는 얼마나 예뻤던지. 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애써 왔던가, 앞으로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생각들이 슬며시 올라왔지만, 서인은 애써 다른 생각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깟 학교… 학교 하나 그만두는 거… 그거, 별일 아니야….
서인과 달리 여름이는 묘하게 홀가분해 보였다. 정말 기분이 괜찮은 걸까. 그토록 그만두고 싶었던 학교를 드디어 떠나서 시원한 걸까, 하지만 여름이의 표정만으로는 쉽게 단정 짓기 어려웠다.
여름이는 탄탄면을 먹자고 했고, 성수동에 들러 약과 쿠키를 사자고도 했다. 여름이가 먼저 어디를 가자고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어서, 서인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탄탄면을 먹고 도착한 베이커리는 연한 민트색 외관이 사랑스러운 아담한 매장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내부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포장만 가능했고, 한 팀씩만 들어갈 수 있었다. ‘약과쿠키’는 모두가 알고 있는 약과와는 달리, 크고 두툼했다. 알록달록 화려한 쿠키들이 매장 한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여름이가 고른 몇 개의 쿠키를 구매했다. 서인은 성수동 주변을 좀 더 걷고 싶었지만, 여름이의 제안대로 곧장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날은 서인과 여름이가 등교 문제로 힘겨워했던 시간이 끝난 날이지만, 불확실한 내일이 시작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