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여름
학교를 그만두기 전 반년 동안 여름이는 방 안 침대 속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잘 먹지도 않았고, 누워만 있을 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듯했다. 서인은 습관처럼 여름이 방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서성거렸다.
재준은 일 때문에 해외에 거주 중이었고, 가을이는 대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멀리서 바쁘게 지냈고, 서인은 늦은 나이에 재취업을 한 지 어느덧 1년에 가까워졌다. 오후 4시 반, 퇴근 후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늘 어둡고 가만했다. 서인은 어떻게든 여름이를 방 밖으로 끌어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방에서 나와 함께 TV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여름이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세상 끝까지라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에 관심이 많은 여름이를 위해, 가을이와 서인, 세 사람은 두 차례 일본을 다녀왔다. 가을에는 후쿠오카를 여행했다. 첫끼는 무조건 라멘이어야 한다며 하카타역에서 라멘 한 그릇을 먹었다. 서인은 나마비루 한 잔을 곁들였다.
세 사람은 유후인으로 넘어가기 위해 유후인노모리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부가 아늑하게 꾸며져 있고, 유후인으로 가는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인이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 둔 열차였다. 치익-,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유후인노모리는 무광의 다크그린색으로 앞머리가 유선형으로 매끄러웠다. 한눈에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둘 앞으로 나와 카메라를 들고 유후인노모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열차 내부에서는 에키벤을 구매할 수 있고, 승무원들이 유후인노모리 이름이 적힌 기념 패널과 모자를 가지고 와서 사진을 찍어주는 서비스도 제공된다고 했다. 재미있겠다! 며 한껏 기대했던 가을이와 여름이였지만, 아침 8시 비행기를 타려고 새벽 4시부터 움직였던 탓인지 열차에 오르는 순간, 모두 곧바로 잠에 빠지고 말았다. 서인은 혼자 열차 안을 천천히 구경하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계곡, 논밭과 작은 마을을 바라보았다. 승무원이 기념 패널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서인은 그냥 안 찍는다고 할까, 잠시 망설였다. 나라도 찍자 싶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모자가 함께 제공되지 않은 게 의아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인은 유후인 여행이 두 번째였다. 몇 년 전에 친정식구들 - 부모님, 언니 영인, 동생 정인과 함께 왔던,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서인은 이번에도 전통 일본식 숙소에 묵었다. 세 사람은 화사한 벚꽃이 그려진 핑크색 유카타를 입고 투박한 나막신을 신었다. 식당으로 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어정쩡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저녁식사로는 가이세키가 제공되었다. 식사 중 더 나올 음식이 없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이가 많아 보이는 종업원은 영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서인과 가을이는 난감해했다. 그 순간 여름이가 일본어로 ‘음식은 이게 전부인가요? 하고 물었다. 서인과 가을이는 여름이가 일본어를 하는 것에 한 번, 또 낯선 식당에서 직접 묻는 적극적인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오호-, 감탄과 함께 서인과 가을이는 여름이에게 엄지 척을 날렸다. 그 후에도 여름이는 종종 일본어를 활용하는, 생각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낮에는 동화 같은 유후인 골목길을 산책했고, 히츠마부시나 롤케이크, 과일 모찌나 푸딩 같은 맛있는 음식들을 맛보았다. 밤에는 온천의 노천탕에 몸을 담가 낮동안 쌓인 피로를 풀었다. 크고 작은 바위로 둘러쳐진 온천에 등을 기대어 고개를 들면 나뭇잎 사이로 검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무수한 별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세상만사 근심 하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음 해 2월에는 겨울 여행지로 손꼽히는 홋카이도를 찾았다. 삿포로에서는 미슐랭 2 스타 식당에서 분위기를 만끽하며 오마카세 초밥을 먹었다. 식사가 후반으로 갈수록 배가 불러온 탓에, 가을이가 ‘샤리를 조금만 줄여달라’고, 영어로 조심스럽게 세프에게 부탁을 했다. 그는 하이, 하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초밥의 밥 양은 그대로였다. 그가 부탁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이해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세 사람은 그냥 먹기로 했다. 맛은 일품이었지만 너무 배가 불러 한동안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다음날에는 한국에서 여름이가 직접 전화로 예약을 한, 현지인이게도 유명한 이자카야를 갔다. 종업원들이 오이사~! 오이사~! 를 힘차게 외치며 연어알을 밥 위에 올리는 퍼포먼스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서빙받는 손님은 적당한 때에 '그만'이라는 뜻의 스트, 혹은 스트마레를 외쳐야 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있던, 다른 지역에서 온 것 같은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하는 퍼포먼스를 보고는 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게 내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초집중되는, 볼 때는 재미있지만, 그 주인공은 사양하고 싶은 것이었다.
오타루에서는 정말 눈이 많이 내렸다. 여행 전 때맞춰 재개봉한 영화『러브레터』를 보았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가을이는 영화 보는 내내 작게 코까지 골며 자다가 영화가 끝나고 여름이가 깨워서야 일어났다. 오타루에서 바라본 풍경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세 사람은 부츠를 신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쳐 유명한 수산시장을 찾아갔다. 신선한 회와 생새우, 연어알, 성게알이 푸짐하게 올라간 카이센동을 맛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오타루역으로 가는 길에 장난기 많은 가을이가 커다란 눈덩이를 만들어 여름이에게 던지면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함박눈을 맞으며 넘어지고 뒹굴면서도 두 아이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서인은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주 잠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