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여름
재준은 여름이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진 것을 확인하고, 오후 3시가 다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중환자실은 하루 한 번, 오전 10시부터 30분간, 단 한 사람만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그날은 더 이상 면회가 불가능했고, 다음날에나 여름이를 볼 수 있었다. 재준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던 가을이에게 전화를 걸어, 늦지 않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가을이가 몰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다. 아빠에게 그런 전화를 받아본 적 없던 가을이는 4시 30분쯤 집으로 왔다.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가을이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뒤늦게 소식을 듣고, 괜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준이 119에 전화를 걸었다. 여름이의 보호자라고 신분을 밝히고, 누가, 언제 신고했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신고자가 누구인지는 개인정보 보호상 알려줄 수 없다고 했고, 지나가던 행인이 우연히 발견해 신고했다고만 말했다. 신고가 접수된 시각은 8시 59분이었다.
여름이의 마지막 통화는 8시 43분이었다. 통화 시간은 1분 남짓. 통화를 마친 여름이는 방에서 뛰어내렸다. 평소 인적이 드문 그곳을 지나던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했고, 8시 59분 119에 신고했다. 16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여름이는 곧바로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9시 30분, 경찰이 서인의 집을 찾아왔다.
소방서는 서인의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고, 여름이가 옮겨진 종합병원은 차로 10분 거리였다. 운이 정말 좋았다고 생각되었다. 여름이를 발견해 준 이름 모를 행인도, 신고 전화를 받아준 직원도, 앰뷸런스를 운전해 주신 분도, 응급실 선생님들도, 그리고 소방서와 병원이 가까웠던 집조차도—물론 여름이가 뛰어내린 집이긴 하지만—그 순간만큼은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은 여름이가 화실에 가는 날이었다. 서인은 마음을 가다듬고 원장님께 연락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 여름이도 가을이처럼 원장님께 좋은 가르침 받기를 기대했는데, 더는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 없는 원장님은 정중히 답을 주셨다, 시간이 지나 마음의 변화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장님, 여름이는… 영영 화실을 갈 수 없을지도 몰라요….
저녁에는 여름이가 친구와 압구정로데오역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었다. 혹여 친구가 하염없이 여름이를 기다리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서인은 오랜 친분이 있는 친구의 엄마에게 문자를 남겼다, 오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여름이가 통화가 안 될 수도 있어서… 내가 대신 연락해. 희영이한테 미안하다고 꼭 전해줘.
시계 소리도 멈춘 듯,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그 위로 어둠이 짙게 깔렸다. 서인은 여름이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아래에서 몸을 길게 늘어뜨린 채, 뽀얀 배를 드러내며 자고 있던 후추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동그란 두 눈으로 서인을 올려다보았다. 후추야, 언니 기다리니? 언니는 언제 집에 올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서인은 몸속에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베개 끄트머리에 머리를 기댄 채 옆으로 누웠다. 여름이의 핸드폰을 들고,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최근에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이렇게 해맑게 웃는 너는 어디로 간 거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어떻게…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니, 엄마 아빠는 어떡하라고…. 여름이의 베개가 흠뻑 젖었다.
중환자실 앞 복도는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10시, 면회 시작합니다, 안내가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람씩 출입증을 찍고 중환자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재준과 함께 벽에 기대어 있던 서인도 그들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여름이가 있는 곳은 외과계 중환자 1실이었다. 복도를 지나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간 그곳은 아주 밝고 아주 하얬다. 은은한 소독약 냄새와 곳곳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기계음이 낯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름이 담당 간호사가 일회용 가운과 장갑을 건네주며 착용하라고 안내했다. 반투명한 가운은 너무 커서 입은 건지 뒤집어쓴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가운 아래로 보이는 베이지색 스니커즈는 희고 깨끗한 중환자실과 대조를 이루었다. 어찌나 지저분해 보이던지 서인의 신발을 볼리만무한 환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입구를 제외한 세 벽면에는 각각 문이 달린 1인용 치료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중앙에는 커튼으로 나뉜 개방 병상들이 놓여 있었다. 여름이는 열네 개의 병상 중 13번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는 여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양 손목이 침대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마 위와 콧구멍 속, 입안, 손등 위에는 체온 측정과 수액 공급, 심박수와 산소포화도 체크를 위한 여러 튜브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모니터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된 네댓 개의 선들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 옆으로는 크고 작은 숫자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수많은 기계들이 여름이를 보호하는 듯 둘러싸고 있었다. 여름이는 갓 태어난 아기가 낮잠을 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행복한 꿈을 꾸는 듯 보였다.
사진을 찍으려던 서인은 큰 잘못을 저지르려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모습을 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어색한 손길로 여름이의 얼굴을 살며시 만지며 속으로 되뇌었다, 어서 일어나, 여름아. 엄마랑 집에 가야지. 사람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청각이 작동하고, 죽는 순간까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때 여름이의 귀에 대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여름이는 홀로 남겨진 그곳에서 조금 덜 무섭고 덜 외로웠을 텐데.
여름이의 감긴 왼쪽 눈가 끝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옅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여름이는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재준에게 티슈를 챙겨가서 깨끗이 닦아주라고 해야겠다.
서인과 재준, 가을이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그들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간간이 들려오는 한숨소리만이 적막한 방 안을 맴돌았다.
재준이 말했다, 우리… 미드나 볼까? 서인과 가을이는 답했다, 그래. 재준이 리모컨을 돌리며 계속 물었다, <프리즌 브레이크> 어때? 좋아. <브레이킹 베드> 볼까? 그래. <종이의 집>은? 그래. 그렇게 세 사람은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을 보기 시작했다. 한 화가 끝날 때마다 재준이 물었다, 계속 볼까? 그래, 서인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세 사람은 잠이 쏟아져 저절로 쓰러질 때까지, 보고 또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