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간

눈부신 여름

by 글 쓰는 여자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운 날이었다. 더위는 공기 속에 눅진하게 배어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진 여름 하늘은 눈물이 맺힐 만큼 맑고 푸르렀다.


병원에서 나온 재준이 말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맑은 대구탕을 포장해 갈까? 서인은 지금 그게 먹고 싶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재준은 힘찬 목소리로, 진짜 배고프다, 고 말하며, 식당에서 가져온 쌀밥을 공기에 담았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팔팔 끓인 대구탕을 식탁 위에 놓고, 라디오를 틀고 적당한 볼륨으로 맞추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재준을, 서인은 식탁 앞에 앉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직접 담근 연한 황금빛의 더덕주를 가져와 입이 넓은 잔에 한가득 부었다. 찌개를 한 숟가락 크게 떠서 후루룩 들이켜며 맛을 보았다, 부산에서 먹었던 맛과 얼추 비슷해. 맛있게 먹자, 재준이 말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던 서인은 느릿느릿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한 손으로 문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문 안쪽 수납공간에서 대구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쯤 남은 레드 와인을 꺼냈다. 와인잔을 꺼내 넉넉히 따랐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잔을 부딪쳤지만, 적절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대구 가시의 속살까지 꼼꼼히 발라 꾸역꾸역 먹었다.






서인은 3 주 전, 송파구청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열리는 강좌를 신청했었다. 주제는 ‘우울하다는 우리 아이, 어떻게 도울까요’였다. 오늘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강좌를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차 공간이 협소하오니, 내일은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인은 잠시 문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늦었어요. 나는 이제 우리 아이를 도울 수가 없어요. 서인은 문자 메시지를 지웠다.





잠에서 깬 서인은 커튼이 닫힌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평소에는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전날의 꿈은 유난히 또렷했다. 여름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꿈속의 여름이는 서인의 무릎 위에 앉을 만큼 어렸다. 서인이 물었다, 여름아, 왜 그랬어? 그렇게 힘들었어? 여름이는 쑥스러운 듯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응. 너무 속상했어.


여름이가 깨어난 꿈이었다. 여름이가 정말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회를 마치고 병원에서 나와 평양냉면집으로 향하던 길에 로또 판매점이 있었다. 거의 매주 로또를 사는 재준을 따라 서인도 들어갔다. 재준이 의아하다는 듯 서인을 바라보았다. 여름이 꿈을 꿨어. 나도 살래. 서인은 직원에게 만원을 내밀며 재준이 했던 말을 따라 말했다, 만원 어치 자동이요.


이틀 후, 당첨 번호를 확인했다. 여섯 개 숫자 중 네 개가 맞았다. 꽤 큰 금액일 거라 생각했지만, 당첨금은 고작 5만 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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