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잠시 머물다 2

눈부신 여름

by 글 쓰는 여자



새로운 바람을 담아 이사를 했다. 재준은 이사를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일주일 후 다시 튀르키예로 떠났다. 가을이는 학교, 아르바이트, 작업실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서인은 일을 그만두고, 골프를 접었으며, 불필요하게 많던 친목 모임도 가지 치듯 하나둘 줄여나갔다. 이사 후 모든 게 한결 나아지리라 기대했지만,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여름이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어느 무더운 날, 여름이는 프랑스 자수를 배우고 싶다며 공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집 근처에 한 곳이 있었다. 한 달가량 선생님과 단둘이 수업을 하다가,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남학생이 방학을 맞아 새롭게 들어왔다. 치과의사가 꿈인 그 아이는, 손끝 감각과 솜씨를 키우기 위해 자수를 배운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여름이에게 전해 들었을 때, 서인은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손재주가 좋은 여름이는 어렵다는 프랑스 자수를 곧잘 해냈다. 둥근 나무틀에 천을 끼워 수를 놓고 있는 모습은, 오래된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단아했다. 손수건이나 파우치, 동전지갑 그리고 러너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멋진 소품으로 탈바꿈시켰다.


더위가 절정에 달하던 8월 초, 서인과 가을, 여름이는 재준이 있는 튀르키예로 한 달 살이를 떠났다. 튀르키예의 여름은 기온이 30도 전후로 서울과 비슷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햇살이 강해도 비교적 쾌적했다. 아침저녁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오히려 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재준이 머무는 곳은 이스탄불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한적한 동네였다. 아침마다 재준이 회사로 나가면, 서인과 가을, 여름이는 아파트 단지의 수영장에서 한가롭게 수영을 했다. 수영을 못하는 서인은 암링을 끼고서야 물속의 자유를 만끽했다. 물을 좋아하는 가을이는 긴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고도, 늘 나오기를 아쉬워했다.


서인이 운전해 인근 쇼핑몰에 가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터키식 브랙퍼스트, 오믈렛 혹은 다양한 종류의 케밥을 먹었다. 치즈와 빵, 신선한 샐러드와 구운 채소가 곁들여 나오는 터키식 아침식사는 푸짐했고, 다양한 종류의 케밥은 먹을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터키식 커피나 차이티도 자주 마셨다. 고운 커피가루가 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터키식 커피와 투명한 붉은색의 차이티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이다. 커피는 진하고 쌉싸름했고, 차이티는 약간의 떫은맛과 함께 은근한 향신료 향이 배어 있다. 서인은 처음엔 낯선 맛이 거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에 익숙해졌다.


먹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카이막, 달고 고소한 바클라바, 진한 피스타치오 맛의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도 빠뜨리지 않았다. 가끔 남자 직원들이 '아이 러브 코레' 라며 쿠키나 초콜릿 같은 간식을 서비스로 내어주었다. 우리는 힘들게 외우고도 가끔 헷갈리는 '테셰퀴르 에데림'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재준은 그곳에 있는 동안 한 번도 그런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다면서, 튀르키예 남자들, 아주 수상해. 항상 조심해, 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저녁에 재준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집이나 레스토랑, 또는 그곳의 유일한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쇼핑몰에 가서 볼링이나 포켓볼을 치기도 했다. 여름이는 아빠에게 난생처음으로 포켓볼을 배웠다. 밤이 되면 현지인으로 북적이는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생과일주스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주말에는 이스탄불이나 사카리아 같은 도시로 여행을 떠나 새로운 풍경과 만나기도 했다.


튀르키예에 머무는 동안, 한국에서는 ‘레전드 밴드들의 서바이벌’이라는 타이틀 아래 ‘불꽃밴드’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놓치기 아쉬워 다 함께 시청했다. 재준은 한때 밴드의 보컬이었고, 지금도 자신이 무대만 없을 뿐 록커라고 믿는다. 전인권밴드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같은 노래를 들으며 재준과 서인은 옛 추억에 잠겼고, 가을이와 여름이도 그 시절 음악의 매력에 함께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 남아 있는 소금이와 후추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가을이의 친구에게 부탁했다. 간간이 도착하는 사진 덕분에 그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재준이 사는 단지에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었고, 주민들은 그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보살폈다. 서인의 가족은 소금이와 후추가 남긴 빈자리를 그 고양이들과의 만남으로 채웠다. 그곳은 길고양이가 행복한 나라였고, 떠돌이 개들이 보호받는 나라였다.


평소에도 재준을 잘 따랐다던 한 고양이는, 서인과 가을, 여름이가 튀르키예에 도착한 날부터 모습을 드러내더니, 네 식구가 외출 후 아파트 공동현관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문 앞까지 따라왔다. 한참 후 살며시 문을 열어보면 새하얀 꼬리를 동그랗게 말고 현관문을 바라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집으로 들이자,는 가을이와 여름이의 부탁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 아이는 매일 아침 그들과 함께 나갔다가, 저녁에는 또 같이 집으로 들어오는 한 식구가 되었고, 하티라는 이름도 얻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가을이는 하티를 한국의 집으로 데려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재준과 서인의 만류에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서인과 가을, 여름이는 그렇게 유유자적한 한달살이를 만끽한 후, 재준만 남긴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관심이 많던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며 여름이 스스로 어학원을 알아봤다. 버스를 타고 주 3회 학원에서 공부했다. 겨울에는 농구를 배우기 위해 주 2회 체육관을 다녔다. 당근에서 구매하게 된 농구공을 받으려고 서인은 여름이를 태우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곳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훤칠한 남학생이 농구공을 들고 서있었다. 차 안에서 여름이는 얼굴을 가리고, 서인이 공을 받아왔다. 서인은 여름이와 함께 단지 내의 농구장이나 한강 공원에 있는 농구장에 가곤 했다. 드리블하고 슛을 날리는 여름이의 모습을 서인은 카메라에 남겼다.


여름이는 서인과 함께 테니스를 한 달 배우고, 일일 클라이밍 체험도 했다. 모두 여름이가 원했던 것들이었다.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것이, 서인은 그저 감사했다.


차가운 바람이 낙엽을 몰고 다녔다. 가을은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재준은 베트남과 튀르키예를 거쳐, 2년 만에 한국으로 왔다. 재준이 돌아온 후 집안에는 한결 활기가 넘치고 대화가 더욱 많아졌다. 가을이는 졸업전시회 준비로 여전히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서인과 가족들은 여름이 앞에서 검정고시나 학교, 미래 계획 같은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이듬해 2월 초, 여름이가 일반 고등학교로 편입하고 싶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서인의 심장이 요동쳤다. 여름이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왜 갑자기 학교에 가고 싶어졌어? 다시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여름이가 다시 학교에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름이는 한결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서랑 통화하다가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은서가 그러는데, 일반 고등학교도 괜찮대. 은서는 여름이와 같은 예술중학교를 졸업한 친구였다. 애니메이션고 입시에 실패한 후, 일반 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예술중학교와 예술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에게 일반 고등학교는 낯설고, 때론 두려운 곳이었다.


여름이는 며칠 더 고민을 이어갔다. 편입을 결심한 뒤, 집 근처의 고등학교들을 하나씩 알아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3월,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로 편입했다. 10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이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여름이의 평범한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서인은 충분했다. 새로운 학교에서 여름이는 활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껏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자주 웃었으며, 집 안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여름이의 시간이 조금씩 열리는 것만 같았다. 눈부신 햇살 아래, 여름이는 다시 살아 있었다. 10개월간 웅크렸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듯했다. 정말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불과 넉 달 뒤, 여름이를 감싸고 있던 찬란한 빛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빠르고 조용하게.

keyword
이전 07화햇살은 잠시 머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