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캐나다로 온 이유 2018.11.04

by 이종구Burnaby South

내가 캐나다로 온 이유 2018.11.04


2001년 가을 우연히 와이프와 함께 저녁tv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캐나다로 이민간지 알마안된 중년의 부부가 사는 일상 생활이 담긴 것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신랑은 직장에 출근하는 모습이 담긴프로였다. 마침 그 신랑은 현대자동차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캐나다로 간 사람이었다.그 프로그램을 보고나서 와이프는 내게 물었다.”여보 우리 저사람처럼 캐나다로 가서 살아볼까?”

사실 나는 해외에 나가 사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잦은 해외 출장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어 있었음므로 흔쾌히 그러자고 동의를 했다.그리고 망설임이 없이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웠던 사람처럼 캐나다 영주권 신청절차와 방법에 대해 캐나다 이민국 인터넷 웹싸이트에 들어가서 알아보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당시 나는 이미 회사에서 고급간부였으므로 시간적,정신적으로 여유가 일반직원에 비해 더 많이 있었으므로 모든 영주권 신청서류를 내가 직접 준비를 하게 된다. 매일 퇴근후에는 집에 돌아와서 주민등록등본,초본등 모든 공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여러가지 캐나다 정부가 요구하는 구비서류등을 준비하게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정확히 1달간의 서류준비를 마치니 두꺼운 책 한권 두께의 캐나다로의 영주권 신청서류가 완성이 되었다. 와이프가 그 영주권 신청서류들을 서울시내 중심가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 제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대사관이 요구하는 영어능력 테스트인 IELTS영어시험도 보고 그리고 영어회화 능력시험도 캐나다 면접관과 인터뷰를 보게 된다. 1년여가 지나고 2003년초에 캐나다 대사관에서 이민비자 즉 영주권을 발급 받게된다.


그당시에 나는 다니던 회사의 미국현지법인 발령문제도 함께 걸려 있었지만 여러가지 상황이 항구적인 체류(영주)가 보장이 되는 캐나다로 가는 것이 나을것으로 판단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캐나다로의 이주를 결정하게된데에는 두가지의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아들인 큰아이가 모든과목을 다 잘해야하는 한국의 교과과정에 잘 맞는 학생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부부는 아들이 교육환경적으로 더이상의 자존감을 잃을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학업성취의 결과물에 의하여 자기의 인생을 살면서 지속적으로 고통을 받을 자식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문제는 우리 부부에게는 지상최대의 풀어야 할 과제였다. 그래서 내가 와이프의 캐나다로의 이주 제의를 즉시 동의할수 있었던 것이었다.캐나다로오려고 한 둘째 이유는 내가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무한정 오래하기가 쉽지 않을것 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40대중반인 내가 60세 정도에 은퇴하기 전까지 또다른 15년을 살아남는 것는 한국의 직장생활 환경에서 살아남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도 다른 길을 모색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었다.


당시 나는 가장으로서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회사 특성상 근무지를 울산으로 옮겨서 6년간이나 생활을 해야 했었으므로, 특히 4살 더 나이어린 딸에 비해서 아들에게는 고스란히,전학등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주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그와 달리 좋게 생각하면 그것이 아들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더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2003년초에 온 가족의 캐나다 영주권비자가 나왔을때 나와 와이프도 기뻐 했지만 우리만큼 중학교를 이미 마친 큰아이도 캐나다로 간다는데 대하여 즐거워 하였다.둘째인 딸아이는 아직은 판단력이 많지 않았을 고작 5학년 초등학생 이었으므로 어쩌면 아무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보통의 남매와 달리, 그야말로 보는 사람마다 남매간에 다툼도 없고 둘 사이가 놀랄만큼 좋다는 말을 아이들이 자라면서 주변에서 참 많이 들었었다.나는 그 두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언쟁을 하는것을 정말로 본적이 한번도 없다.(큰아이는 모든사람들에게도 그러하지만 동생에게는 더욱 너그럽고 친절하고 잘놀아주는 재미있는 착한 오빠이다)


영주권비자를 받고 비행기표 날짜를 고르던중 우리는 결혼기념일인 5월9일에 landing을 하자고 하여 2003년5월9일에 켈거리에 랜딩을 하고 미리 예약을 한 민박집에 여장을 풀게된다. 켈거리는 job opportunity가 많다고 해서 처음 우리가 랜딩을 하게 되었다.


민박집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일어나니 아침에 창밖에 싸리눈이 몇cm가 마당에 내려 있었고 “이곳은 5월초인 지금 초여름인 서울에 비해 참 춥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추위를 유독 잘 못견디는 나는 아직 자고 있는 와이프를 깨워 추워 못살겠다며 벤쿠버로 가자고 얘기를 했더니 와이프도 금방 동의를 해 주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미니벤을 랜트한 우리 가족은 미니벤에 이민가방 5개를 싣고 켈거리에서 아직 눈이 녹지않은 록키산맥의 벤프(그날 오전 벤프에서 들른 패스트 푸드점 앞에는 쌍무지게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사진 첨부) 켈거리를 출발하여 벤프와 록키산맥을 넘어서 10시간 정도를 운전을 하여 밴쿠버에 도착하게 된다.


큰아이는 이미중학교를 마치고 고1때 캐나다에 왔으므로 우선 머리가 한국식으로 많이 굳은 아이였으니 아무리 자기가 캐나다가 좋다고 하더라도 아카데믹한 적응을 하는것은 또다른 문제 였을 것이다. 언어장벽등 적응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큰아이는 나이에 비해 뒤늦은 이민 학업생활에 적응을 위하여 학교 당국에 1년을 학년을 낮추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시간을 조금 벌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나는 지금도 아이들을 생각하면,잘 견뎌내고 적응을 해준것이 정말 고맙다.(그리고 애들에게 항상 고맙다고 말로 표현을 한다)


물론 딸아이는 애초부터 한국에서도 그랫듯이 캐나다에 와서도 straight A student이었으므로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았다. 두아이는 거의 매일 학교를 마치고 메트로타운몰 옆에 있는 버나비시립도서관에 가서 함께 공부를 밤 늦게 까지 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아이들의 노력에 더하여 나도 여느 이민자들이 그렇듯이 열심히 직장생활을 함으로서 아이들에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그리고 와이프는 가족의 영양nutrition을 챙기고 가사에 전념하므로 우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캐나다에 와서 술을 끊게 되었다.애초부터 나는 한인사회에 들어가 기웃거릴 생각도 없었고 교회에도 다니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사람을 만날일이 없으니 같이 술먹을 사람도 없었다.그리고 나중에 와이프 얘기가 자기는 캐나다에 온지 처음 7년동안은 한번도 돈주고 새옷을 사서 입은 적이 없다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사진설명

.2003년 캐나다로 전가족이 떠나기전 캐나다 정부로부터 받은 영주권 비자


.최초로 랜딩을 한 켈거리를 하루만에 포기하고 미니밴을 랜트하여 이민가방 5개를 싣고 벤쿠버로 오는길에 지나간 벤프 록키산맥의 눈덮인 바위산.


.점심을 먹기위해 내린 KFC점 앞에 나타난 쌍무지개.


.2003년 6월초 캐나다에 도착한지 보름만에 나와 와이프는 월세 렌트비 내기가 아깝다고 바로 집을 사게된다.


이집은 크지는 않지만 아늑하고 split floor house인데 보통의 집보다 마당이 매우 넓고 무엇보다도 차고가 크고 새로지은 것이 매력이 있어서 구매를 하게 되었다.차고에는 런닝머신, 히터도 설치하여 여러가지 각종 도구를 만들거나 수리를 하는 공작도하고 달리기등 운동도 하므로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나는 뭐든지 고치고 만들고 하는걸 좋아한다)


.이 집에서 캐나다에 온 다음달인 2003년 6월초부터 지금까지 거의 16년을 살고 있다.아들은 동부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11년전에 집을 떠났고 딸도 몇년뒤 오빠와 같은 학교,같은 학과인 컴퓨터공학과로 전학을 하며 동부로 떠나감으로서 7년전인 2011년부터 우리 부부 둘만이 살게 되었다.



이집을 처음 샀을때 아래층은 unfinished였는데 내가 홈디포에 가서 온갖 자재와 레노베이션 책을 사서 공부해가면서 방을 두개를 두달넘게 마루,천정등을 꾸며서 finished floor로 만들게 된다.

.사진에 보이는 뒷마당의 단풍나무는 2003년 의 처음보다 키와 볼륨이 거의 2배로 자라났다. 나는 이집에서 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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