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항상성 (上)

타의적으로든, 자의적으로든 배움이 당연시될 수밖에 없게 된 계기

by 찐빵

바뀌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왜 이불 하나 개는 것조차 귀찮아할까.

그런 부류를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 이미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불평불만을 할 시간과 에너지를 긍정적인 곳에 투자해도 될 텐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 점부터 달랐다. 난 남들에 비해 동기부여를 잘했다. 과하게 잘한게 문제였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에게 가혹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과로로 쓰러지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사에 몸을 갈아넣기 일쑤였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선의 결과, 최고의 결과, 그리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될 때까지 쉬지 않는 건 어느 새 당연한 일이 됐다. 그래서일까. 끈기라는 수식어는 내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됐다.


노력의 악마. 난 나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

행동에 온갖 이유를 붙이고, 기어이 해낼 때까지 도전하는 사람. 그게 곧 나의 정체성이다.




난 철부지였다. 틈만 나면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일쑤였고, 학원에서도 공부보다는 딴짓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 나와는 달리 형은 머리가 상당히 뛰어났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수학 하나로 이름을 날리곤 했다. 공부와는 거리가 있었던 내가 수학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아무래도 형의 영향이 컸다. 그런 형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재고를 지망했던 것도, 같은 학원에 들어가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처음 몇 달은—당연한 말이겠지만—수업을 따라가는 게 너무 어려웠다. 예전부터 수강하던 친구들과 진도 차이가 상당했던 탓이다. 풀이에다가 웬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공식을 집어넣지를 않나, "우리 몇 년 전에 무슨무슨 교재에서 배우지 않았냐"라며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하지 않나.

이는 성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첫 시험 점수가 5점이었다. 5점. 100점 만점에 5점. 나름 최상위권에서 놀았다는 사람의 석차가 뒤에서 2등이었다(대체 왜 꼴등이 아닌지는 지금도 영문을 모르겠다).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애들과 늘 같이 지내다 보니 무의식중에 나 정도면 중간쯤 실력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참하게도 발끝조차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생이 수업 수준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강등을 시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5점이 그대로 유지됐다가는 영락없이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형이 속했던 반 정도는 붙어야 가오가 살지 않겠냐'는 일념으로 공부를 해서 들어간 학원인데, 적응도 못하고 나가 떨어지는건 여간 쪽팔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밤샘 공부가 시작됐다. 다른 애들과의 공백기 좁히기, 공식 늘어놓고 적용 조건이랑 증명 외우기 등등 손에 집히는 대로 공부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휴대폰이 아닌 책을 쥐었던 사람도,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틈날 때마다 책을 폈던 사람도 내가 유일했다.

나만이 알아줬던 고독한 싸움이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 몇 달이 지나고 윗반 아랫반 통합으로 기출 시험을 봤는데,

성적표에는 7이라는 등수가 써져있었다.


..말도 안 돼. 그 숫자를 보고 난 후의 첫 반응이었다.

기뻤다. 너무 기뻤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한 자릿수 등수가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다. 발전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니 더더욱 보람찼다.

노력에 맛을 처음 들이게 된 것도 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으니 보다 나은 자신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더더욱 열과 성을 들이게 됐다.

신은 자신을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이후 도장깨기를 하듯 업적을 하나씩 세워나갔다. 무엇보다 영재고에 합격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처음으로, 우상처럼 바라보던 형을 넘어섰던 순간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노력하면 뭐든지 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불행은 시작됐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영재학교는 정확히 그런 곳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살아서 나가기만 해도 본전 이상은 뽑는 학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영재학교에서의 하루하루는 가혹함의 연속이었다. 핸드폰 사용이 제한되고, 학교에서 삼시세끼를 해결해야 하며, 기숙사에 틀어박힌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던 내겐 정신적 고통까지 가미됐다.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학원을 다니는데도 내 성적은 항상 바닥이었다. 누구는 맨날 전교 순위권에 드는데 말이다. 씁쓸한 얘기지만, 재능의 벽은 실존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실력차이가 나는거지?' 늘 그 생각 뿐이었다.

여담이지만 친구들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 뒤에는 성적이 한 몫했다. 학습 활동이 거의 8할을 차지하는 학교인지라 실력만 있다면 인정받을 수 있다. 선생에게도, 친구에게도. 다시 말해 등수가 곧 '신분'이다. 동아리에서 프로젝트를 기획하든, 대회를 나가든, 수행평가 조를 짜든 간에 성적이 높다면 항상 그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인다.

멍청하면 정반대의 처우를 받는다. 불행하게도 난 이쪽이었고.


그래도 칠전팔기의 DNA가 새겨져있던 덕분인지, 아직 희망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품고 마지막 발악을 했다. 그 결과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가 달달 출력될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당연히 한두 페이지 하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최선 그 자체였다.


절망적이게도 그 해 중간고사에는 평균보다도 낮은 점수가 나왔다.


성적표를 열어봤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변의 모든 공기가 멈추고, 모든 색깔이 사라졌던,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시험을 망칠 때마다 펑펑 쏟아내던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마 충격을 받아서 그랬을거다. 뭐 그럴 만도 한게, 상위권은 자시고 평균도 나오지 않았다는 건, 영재학교를 턱걸이로 들어왔다는 것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인 즉, 내가 발버둥치지 않는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 날 이후로 신을 믿지 않았다. 아니, 차별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날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이 성적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우울증과 무기력함도 달고 다녔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곳이라는 걸 배웠음에도 할 수 있는 거라곤 노력뿐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날고 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좀 놀아봤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처량하게 무너질 수가 있었을까 싶다.


말도 안 되는 결단으로 들리겠지만, 모든 공부를 관뒀다. 그저 버티기에 치중했다. 공부가 싫은 게 아니었다. 성적으로부터 배신당하기 싫어서 기대를 저버렸던 것뿐이다. 이때가 아마 공부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해방된 유일한 시기였을 거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걸린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재생됐다. 전부 의미 없어 보였다. 대체 공부를 뭐 하려 했을까. 차라리 놀았더라면 그래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유복한 학창 시절로 남을 수 있었을까. 추억도, 현실적으로도 남은 게 없다면 내 세월은 대체 무얼 위해서 흘려보낸 걸까. 후회만 가득했지만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시간들을 잃어버렸다고 단정지어버리자 보상 심리는 커져만 갔다. 당연히 대학을 결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구밖에 내세울 게 없는 학교를 들어간다면, 분명 지옥같은 현실이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 가슴 깊숙히 욱신 거릴게 눈에 훤했다. 인서울을 더더욱 갈망했다. 미국에 가면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처럼,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연애도 해보는 '대학교 드림'이 있었다. 대학교에 가면, 어떻게든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작 대학생이 되자 걱정부터 앞섰다.

학창 시절을 깡그리 공부와 성적에만 처박은 탓에 다같이 노는 방법을 까먹었다. 애들과 뭘 해야 재밌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대화가 통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학 가는 초딩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노는 방법마저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자랑 뭘 하는 데에는 젬병 그 자체여서, 대화하는 방법과 대체로 어떤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지, 심지어 한평생 엄마가 사준 옷만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패션도 나름 열심히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 노력 무색하게도 변한 건 없었다. 되려 샌님 취급에 쐐기를 박을 뿐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임에 나가는 족족 소외되기 일쑤였다. 개총, 새터, MT, 신입생환영회, 심지어 노상과 산책팟까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전부 그랬다. 내게 놀 수 있는 자격마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게 너무도 억울했지만, 서로 행복을 주고받기에는, 난 너무도 결이 달랐다. 말하자면, 반항아의 삶을 살아왔던 대가였다.

다른 인생을 사는 건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너무 다른 인생을 살면 멀어지기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놀기 위해 분투해야만 했던 내게 고작 몇 달의 시간은 사회화되기에는 너무도 짧았다.



결국 내 인생 첫 과도기에는 강제적인 요인이 대부분이었다. 성장해야만 했던 타의적인 요인 말이다.


남들은 훨씬 더 풍부하고 화려하게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든. 해외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축제도 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노는가 하면, 족보도 쓰고 출튀도 해보고 프로젝트와 동아리를 하면서 인맥도 쌓고 스펙 관리도 했을 것이다.

초라하게도 내게 남은 거라곤, 아니, 남길 수 있는 거라곤, 성적 하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것 딱 하나였다. 배움마저도 없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다운 기억을 포기하는 대신 능력에 올인하는 도박판에 빠졌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적어도 핑곗거리는 생겼다. 애들 못 만날만 했네! 술자리 빠질만했구나! 그걸 의도한 건지도 모른 채 남들이 받아들이면, 그제서야 대학생이 됐다는 이유로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물론 노력하지 못한 게 아니라 노력했음에도 불가능했던 것이지만.

고작 알파벳과 숫자 쪼가리가 인생의 지표가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차라리 그런 편이 분명 조금이나마 행복했을 것이다. 학점은 매진한 만큼 돌아오지만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비극적이지만 2학년이 되고 나니 이마저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철이 없었던 내게 그런 현실은 너무도 차가워서, 복수심이 싹트기까지 했다.

불공평했다.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몇 년 몇 달을 지새웠는데,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왔는데, 돌아온 게 시궁창 같은 현실이라고? 정신상태가 부패될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운빨 하나만으로 최고의 청춘을 만끽했다. 머리가 말이 안 되게 좋은 '재능충'이라던가, 돈이 많은 재벌가여서 '만들어진 천재'가 됐다던가. 심지어는 소위 노는 애였던 같은 반 양아치가 같은 학교를 가기도 했다.

너희는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노력의 양이 곧 행복의 양과 직결된다면, 적어도 걔네만큼은 괴로움에 떨고 있었어야 했다. 그들은 내 룰을 따라야만 했다. 그게 평등이니까.


씁쓸하지만, 그런 망상을 현실로 끌고 오기 위해서라도 성장은 필수적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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