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를 듣다가 그만..

아침, 집안을 환기시키는데,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내 마음에 훅~ 들어온다. 주현미를 좋아했던(어쿠, 큰일날 소리!), 아니, 주현미의 노래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청소년기와 청년기까지는 꽤 음악을 좋아했다. 그 시절 자주 듣던 노래 들은 이제는 모두 중장년이 된 가수들 것이니, 이선희, 조용필, (고)김광석, 송창식, 정태춘 박은옥 등,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가수들이겠다.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졌다. 전화를 할까? 아니다. 글을 쓸까?.


그 '단발머리' 소녀는, 정 중앙 가르마를 한, 단발이 잘 어울리는, 오드리헵번 같은 말똥말똥한 눈망울과 미소, 콧대가 살아있는 여리여리한 아이였다. 영화 '레옹'의 마틸다를 보면서 나는 그녀를 오버랩할 정도였으니까. 마틸다는 앞 이마에 애교머리라도 있지, 그녀는 한올의 머리카락도 자신의 살에 닿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태세의 반듯한 헤어스타일로 항상 종이에 뭔가를 긁적이는 모습이었다. 교실에서는 송골매의 '구창모'와 '배철수' 중에서 누가 더 섹시한지, 누가 더 자신들의 이상형인지, 당장 반대파의 머리채라도 휘잡을 듯이 침을 튀기고 있을 때, 그녀는 어쩜 저리 도도하게 앉아, 읽던 책을 덮고 유치한 우리들을 바라보던지!


거기다가 공부는 왜 이리 잘해서 우리반 친구들은 그녀를 살짝 어려워했다. 우리들한테는 호랑이였던 선생님들도 그 '단발머리' 소녀에게는 정중했다. (남)선생님들을 짝사랑의 대상 아니면 악마로 여기던 여고 시절, 그 거칠고 상처투성이였던 그 시절에, 그녀는 속이 깊고 뭔가 신비로움을 간직한 절제된 행동을 하던 애늙은이(미안,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나네ㅜㅜ) 같았다.


<지식과 진리를 추구하고, 세상 존재에 대한 묵직한 사랑과 지혜를 전하는 유니버셜웨이트메이저카드 2번 고위여사제>


그런데, 어느날, 그 '단발머리' 소녀가 나에게 왔다. 그 지적인 환한 미소를 가지고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 듯 했고, 나는 자발적으로 더 이상 유치하게 놀지 않기로 했다(ㅋㅋ). 학교 문예부에서 교지를 낼 때도 내 친구는 멋졌고 국어시간에 시를 낭송할 때도 멋졌으며 남들은 손바닥 맞는 수학문제를 잘 풀때도 멋졌다. 봐라, 그녀는 내 베스트프렌드다! 나도 레벨 업 된 인간이 되었다!


그녀는 서울로, 나는 지방으로 대학을 가게 되어 간간이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고, 가는 길이 달라졌다. 시적 감수성이 남달랐던 그녀는 여전히 나와 다른 삶을 산다. 신앙인 이라기 보다는 세속 종교인에 가깝고, 자유로움 보다는 틀안에서 먹이를 받아 먹고 사는 듯한 나와는 다르다. 그녀는 우리사회의 가장 상처받은 존재들을 위한 활동, 국제 NGO 활동, 봉사등을 넘어 이제 매일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꺽고 밟는 자연의 존재에게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 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본다. 부끄럽게 나이든 나에게 그녀는 세상과 세월을 탓하지 않고 예전처럼 잔잔하게 내 앞길에 빛이 되어준다. 여전히 그녀는 나의 '자랑스런 친구'다!!


북한의 개성이 고향인, 90이 넘은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살며 그림을 가르쳐 드리고, 실향민 아버지를 둔 딸이 느끼는 애잔함을 아버지의 그림과 함께 실어 낸 책, '쑥갓꽃을 그렸어'를 보며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이 밖에도 그녀의 모든 책들은 한편의 시가 된다. 나는 그녀의 책들을 읽다가 하마터면 뱀을 사랑할 뻔 했고, 내 앞에 기어다니는 벌레에게 더 이상 증오심을 품지 않기로 결심했다(오죽하면 내가 봄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온갖 미물들이 기어나오는게 징그러워서였다.).


예술의, 그 쓸모 없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진정한 문학인, '단발머리' 친구여! 그대 덕분에 나는 '글자' 가 아닌 '글'을 좋아하게 되었고 세상의 속물로만 살지 않게 (아니 더 정직하게는 덜 속물이)되었다. 이제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정태춘 박은옥의 '촛불' 도,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도,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도 모두 우리 시대를 관통하며 위로를 준 노래가 되었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그대가 마음을 준 존재들로부터 평안을 얻고 감정적 위로를 받기를 바란다. 위로가 필요치 않은 존재는 저 멀리 계신 하나님 뿐, 나의 작은 위로(차라리 그리움이라 말할까?)를 그대가 기꺼이 받아 줄 것을 소망하며. 내 소중한 친구, 그대를 소환했다.


'마음은 파도친다'를 다시 읽으며 내 마음도 파도치는 날에 '단발머리' 소녀에게 내 추억의 한 조각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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