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없는 진화론을 가르쳤던 날

왜 교과서는 꼭 기린 이야기일까?

by 페로로

"생명의 진화에 대한 이론에는 두 가지가 있어....(중략) 그러니까, 라마르크가 주장한 '용불용설'기린이 원래는 목이 길지 않았는데,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고 막 용을 쓰다 보니 목이 길어졌다는 주장이지. 그래서 그 자손들도 목이 길어졌다는 거야. 반면에, 다윈의 '자연선택설'우연히 목이 긴 기린과 목이 짧은 기린이 태어났는데,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다 보니 목이 긴 기린이 생존에 유리해서 자손을 많이 남기고, 세대를 거쳐 목이 길어졌다는 주장이야. 너는 둘 중에 뭐가 맞는 것 같니?"


"당연히 자연선택설이죠. 용불용설은 좀 바보 같은데요."


방금 대답한 이 학생은 과학 과외를 통해 만나게 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고 방금 같은 솔직한 단어선택이 매력인 아이다. 그리고 가끔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해서, 참고서에는 없는 나의 생각을 더 전해주고 싶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ㅋㅋ 그렇지. 근데 있잖아. 몇 백 년 전 사람이, 심지어 틀린 이론을 주장했는데도 교과서에 이름이 남았는데, 라마르크 씨가 과연 멍청한 사람이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교과서의 이 기린 예시는 지나치게 용불용설에 불리하도록 들어져 있어. 내가 다른 예시를 한 번 들어볼게. '원래는 내가 힘이 없었는데, 무거운 물건을 열심히 옮기다 보니 근육이 커지고 힘이 세졌다.'라는 예시는 어때? 일리가 있는 것 같니?"


"오. 그건 일리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노력하면 근육이 커진다'는 맞는 것 같은데, '노력하면 목이 길어진다?'는 틀린 것 같잖아. 그래서 진화론을 처음 배울 때 이 기린 예시를 보면, 너처럼 "흠. 당연히 자연선택설이 맞고 용불용설은 바보 같은 이론이군."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근육 같은 예시를 보면, 용불용설도 영 터무니없는 이론은 아니라고. 그런데 왜 '진화론'으로써 용불용설이 틀렸다고 하는 걸까?"


"음... 근육이 큰 건 자식한테 전달되지 않아서?"


"그렇지! 근육이 큰 보디빌더들이 애를 낳는다고 해서, 자식도 근육빵빵하게 태어나진 않잖아? 그러니까 용불용설의 핵심 오류는, 노력하면 형질이 변화된다는 부분이 아니고! 그렇게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는 부분이야. 반면에 자연선택설은, 태어났을 때부터 목이 긴 기린과 짧은 기린이 있었다는 주장이잖아? 이때 목 길이는 선천적인 형질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형질, 즉 유전자에 각인된 정보라는 거지. 그래서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근거가 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솔직히, 이 기린 예시는 좀 아쉬운 것 같아. 용불용설의 오류는 '높은 곳의 나뭇잎을 먹으려고 하다 보면 목이 길어진다고? 개소리네~' 이 부분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은 자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는 부분이니까."


"그럼 교과서에는 왜 기린 예시가 들어가 있는데요"


오. 나도 그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가르쳐서 나랑 생각이 닮게 되는 건가?


"음... 이건 진짜 내 사견인데, 공교육은 우리처럼 깊게 탐구하는 학생들만을 위한 건 아니잖아? 학교 다니다 보면 공부엔 크게 관심 없는 애들도 있잖아. 그런데 용불용설의 예시로 근육 같은 걸 넣으면, 어쨌든 용불용설은 틀린 이론인데, 공부 못하는 애들은 "흠. 이거 맞는 거 같은데 왜 틀렸다는 거지?" 하고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교과서 만든 분들의 어떤, 교묘~한 의도가 들어 있는 거지."


"오. 그럴듯한데요"

"그지?"


교과서와 그를 기반으로 만든 참고서는 정말 잘 만든 책이지만, 용불용설을 비롯한 몇몇 부분은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내용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해하도록 의도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하지만, 똑똑한 학생에게는 그 내용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추가적인 서사가 주어질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그 서사를 제공하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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