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과 존댓말, 그 경계의 언저리에서
다른 대안학교 행사에 학생들과 함께 리코더 합주 공연을 하러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초등과정 학생이 대기실에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반말을 던졌다.
“여기 왜 왔어?”
당황. 그리고 순식간에 튀어나온 나의 존댓말.
“아... 여기 리코더 공연하러 왔어요.”
키가 내 허리 높이쯤 되는 어린이가 재차 반말로 물었다.
“리코더 잘해?”
그래서 또 공손하고 겸손하게 존댓말로 대답해 드렸다.
“연습은 열심히 했어요.”
나를 올려다보는 어린이 눈빛을 보니 ‘그래?’하고 반말이 들리는 듯했다. 이내 가버리는 그 어린이에게 나는 또 ‘이따 봐요’ 하고 존댓말로 인사를 드렸다.
존댓말을 사용하는 교사는 학생들에게 ‘죽을래?’와 같은 표현을 하지 않는다.
‘죽으실래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학생의 인권 따위 생각하지 않던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교사의 칼럼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주장의 글이었다. 존댓말을 사용하면 '죽을래?'와 같은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반말은 기본에 걸핏하면 상스런 욕설을 일삼는 교사들의 수업을 들으면서,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선생님을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교사가 되었다. 꽤 오랫동안 일했던 대안학교가 교사와 학생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하면서 ‘훈련’되었다. 선배교사들을 따라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쉬는 시간에 학생들과 수다를 떨 때도 ‘그랬어요?’, ‘아니에요’ 하면서 존댓말을 했다.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도 존댓말로 적었다. (가끔 학생들이 어이없는 일을 벌여서 화가 날 때면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이상한 말을 내뱉곤 했지만)
존댓말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소리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좀 어색해진다. 그야말로 권력을 남용하거나 횡포를 부리기 어려운데, 그게 오히려 교사의 권위를 높인다고 느껴졌다. 형식적인 존댓말이 아닌, 진심으로 정중한 존댓말을 하는 교사에게는 학생들도 함부로 굴지 못한다는 것을 생활하면서 알게 되었다. 서로 존댓말을 하는 동안에는, 교사도 학생도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가 어렵다.
더불어 졸업을 앞둔 십 대 후반의 학생들이나 졸업생과 존댓말로 대화하면 대화의 질이 높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른과 아이’의 대화가 아니라 ‘어른과 어른’의 대화. 상대를 미성숙하고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누구는 가르치고 누구는 일방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마주 앉아서 함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다. 존댓말의 위엄이란 이런 것이다!
한국어의 경어법(존대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다. 이정복(2008)1)은 한국어의 경어법이 사람들 사이의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그는 존댓말은 예의를 갖추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열어 나가는 데 효과적인 사회적 공기(公器, 공동으로 쓰이는 기구)라고 하였다. 존댓말이 가지는 기능은 다양하다. 지위 관계에 맞게 대우하고, 공손한 태도를 드러내고, 대인 관계를 조정한다. 말로써 예의와 절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존댓말을 사용하며 자라고,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교사가 된 나. 그런 내가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학교에서 남들 몰래 혼자 겪는 어려움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 바로 선생님을 부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루쓰 마리!’, ‘헨닝!’ 하고 친구 이름 부르듯 선생님 이름을 외친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보다 나이 많은 선생님의 이름을 불러재끼는 것이 너무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소심하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고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리거나,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옆으로 가서 말을 걸곤 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17살 학생이든 누구든 나를 이름으로 부른다.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이 없어서 가끔 불러도 못 듣는 때가 많긴 하다) 영어로 대화중이니 반말도 존댓말도 아니겠지만, 일단 이름이 먼저 불리고 나면 나에게는 반말을 하는 것으로 감지가 된다. 목소리나 톤에 따라 명령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게다가 다다다 쏟아내는 영어를 듣고 더듬더듬 답을 하다 보면 어른 앞에 선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되어 버려서, 주눅이 든 상태로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존댓말로 답을 하고 있다. 나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이 던지는 반말에 꼬박꼬박 존댓말로 대답해 드리는 중인 셈이다.
‘여기 왜 왔어?’하고 반말을 던진 어린이가 다닌 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반말을 사용하는 대안학교였다. 기본 철학은 결국 같다. 나이로 따지는 높고 낮음 없이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별명을 친구 이름처럼 부른다. ‘감자(선생님 별명)! 오늘 수업시간에 뭐 해?’ 이런 식이다. 웃어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우리 문화에서 다소 생소하긴 하지만,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에서 나오는 친밀함을 보았을 때는 가족관계 못지않다고 느꼈다. 교사에게 느끼는 벽이 낮다 보니 학생들은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내놓는다. 학교에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 말의 형식으로 관계의 단단한 바탕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김미경(2020)은 한국어의 경어법이 결국은 윗사람과 권력 있는 사람을 위한 존중어라며 비판했다. 또한 존댓말과 반말의 사용으로 사람들 의식 속에 서열화와 차별의식을 재생산시킨다고 했다. 간단한 대화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상대방과의 위아래를 따지고, 혹은 제삼자와의 관계까지 생각하며 줄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그렇다. 머릿속에서 반말과 존댓말로 앞뒤를 재가며 묘한 거리감을 만들고 있던 것은 나였다. 존댓말이 뼈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인가. 실제로 뱉어진 적도 없는 것인데 혼자 그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는 그 무언가. 기꺼이 내놓기가 조금은 꺼려지는 마음상태. 그런 것들이 묘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번은 마호가 뭐라 너무 빠르게 말해서 못 알아듣고 몇 번이나 ‘응?’ 했더니 마호가 번역기를 두들겨 내밀었다.
“.... 해주실 수 있을까요?”
번역기가 들려주는 극도의 정중함에 순간적으로 마호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평소에는 차분한 언니 느낌의 마호였는데, 갑자기 작은 어린이가 되어 나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당황하며 ‘그럼, 그럼, 괜찮아’ 하며 손사래를 쳤다. 휘적거리는 손짓에는 존댓말에서 느껴지는 벽을 허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카를라가 번역기로 돌려 알아내서는 '대단히 감사합니다'를 외쳤을 때도 참 황당했는데, ‘굿 나이트’을 번역기로 돌렸을 것이 분명한 ‘안녕히 주무세요’가 채팅으로 왔을 때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우리 사이의 어색함이란.
한국어로 'Hello'가 뭐냐고 물어오면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안녕'으로 가르쳐준다. 대신 친구나 어린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 이야기를 하면 한국어의 'respectful' 표현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이 이어진다. 나이에 따라, 공적인 상황인지에 따라 존댓말을 쓴다고 이야기했는데, 마리아 샘이 바로 질문하셨다.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 지 처음에 보자마자 어떻게 알아?"
그게 문제다. 그래서 한국인은 그렇게 처음부터 나이를 묻고 위아래를 확인하는 거 아니겠는가. 상대를 높일지, 하대할지, 아니면 나를 낮출지 결정을 해야 대화가 편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면 나이가 많은 적든 존댓말을 쓴다고 답했다.
한국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대화를 단순히 어휘의 조합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다만 인간관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되 피라미드가 아니라는 사실. 때때로 머릿속을 돌아보지 않으면 어느 층계 가운데 스스로를 가두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말의 뒤에는 의미가 숨어있으니 부분으로 전체를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널 만나서 다행이야.”
노르웨이어로 보낸 새해 인사에 한글로 된 답장이 왔다. 반말로.
하루 종일 흐뭇하였다.
덧)
존댓말과 반말의 조합으로 고백하기
※ 참고문헌
1) 이정복. 한국어 경어법, 힘과 거리의 미학, 소통, 2008, p. 5-6
2) 김미경.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 소명출판, 2020, p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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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