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루에 백 번 넘어지기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

by 정인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어야 경기에 나갈 수 있어요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패럴림픽에서 휠체어 스키를 타는 선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휠체어 스키를 처음 배울 때 어땠는지 묻는 질문이 있었던 것 같다. 생김새도 특이한 휠체어 스키를 타고 속도를 조절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일이 매우 어려워 보여서 나온 질문이었는데, 선수의 대답은 결이 달랐다. 선수가 되기 위해 제일 먼저 훈련한 것은, 그 자리에서 휠체어를 통째로 옆으로 넘어뜨린 뒤 스스로 몸을 일으켜세우는 것이었다. 그 선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휠체어와 함께 몸을 세울 줄 알아야 경기에 나설 수 있다고 답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 스키를 신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노르웨이인 선생님과 학생들한테 스키를 언제 처음 탔냐고 물어보면 다들 ‘으잉?’하는 표정이다. ‘언제부터’라는 걸 기억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냥 걸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한다고 봐야 한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한 번은 ‘노르웨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기 스키 장비를 다 가지고 있는 거야?’하고 물었다가, ‘아니, 무슨 질문이 그래?’ 하는 듯한 표정을 보게 되었다. 내 질문이 좀 이상하게 들리냐고 묻자, ‘스키를 타려면 스키 장비가 당연히 있어야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전교생이 다 같이 스키 캠프를 갔다. 선생님이며 학생들이며 ‘너 스키 타본 적 있니?’하고 물으면 ‘한 번도 없다’고 답했는데, 그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재미있을 거야!’하는 반응이었다. ‘뉴비’를 보는 ‘고인물’들의 해맑은 표정에 나도 조금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얻은 것은 재미가 아니고 온몸의 근육통이었다.


일단, 엄청나게 무거운 스키를 받았다. 부츠는 그보다 더 무거웠다. 신는다는 표현보다는 올라탄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은 부츠였다. 아무튼 그걸 들고 옮길 때부터 극기 훈련의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신발을 갈아 신을 때는 부츠에 발을 구겨 넣고 풀었다 조였다 하는 동안 이미 지쳐 버렸다. 부츠와 스키가 연결된 뒤로는 더 난관이었다. 눈밭 위에서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것도 곤란해졌다. 팔을 휘둘러가며 움직여보았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마찰력의 고마움이여!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어기적거리며 아기 걸음마를 하는 나는 선수처럼 현란하게 움직이는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매번 넘어졌다. 리프트에 매달려 올라가다가 줄을 놓쳐서 고꾸라지고, 시작점에서 준비 중인 학생들 사이로 돌진하다 멈추지 못해 넘어지고, 중간에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넘어지고, 경로를 이탈해 가장자리 눈 더미에 파묻히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한두 번 슬로프를 타고 내려왔을 뿐인데, 온몸의 근육세포들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저녁에는 한자리에 모두 모여 그날 스키를 타며 찍은 영상들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이 제출한 영상들은 하나같이 남이 넘어지고 구르는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그걸 보며 함께 낄낄거리는 시간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주인공은 빨간 망토를 하사 받고 다음날 하루 종일 두르고 다녔다. 온몸이 아프다 못해 기분도 다운되어 버린 나는 데굴데굴 구르는 누군가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저게 웃겨? 스키가 발에서 분리되어 흩어지는 위험스러운 모습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샤는 첫날부터 고급자 코스에서 미끄러지면서 얽혀버린 스키에 살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15 바늘인가 꿰맸다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삼일째인가, 카를라는 눈두덩이에 피멍이 든 채로 나타났다. 점프를 하다 앞으로 고꾸라져 눈밭(이라 하지만 거의 얼음판에 가까운)에 얼굴을 정통으로 들이받았다고 했다. 크게 놀라며 걱정하는 나와 달리 카를라는 실명하지 않아서 럭키하다며 웃었다. 여럿이 함께 내려오다 부딪혀 살이 쓸리는 부상을 당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지나갔다. 나의 근육통은 말해봐야 웃음거리의 소재도 되지 못했다.


내가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곳곳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마다 공유되는 영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넘어짐’이 담겨 있었다.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작정하고 점프했다가 저 멀리까지 가서 고꾸라지고, 멀쩡히 가다 뒤에서 돌진하는 학생과 충돌해 난데없이 구르기도 했다. 장면 하나하나에 학생들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지막 날 저녁 한 학생이 스노보드로 점프 후에 착지하다 대(大) 자로 뻗어 미끄러지는 장면이 상영되었다. 역시나 보고 있던 학생들이 아하하 웃으며 반응했다. 그런데 곧 반전이 일어났다.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쭈우욱 미끄러지더니 찰나의 순간에 그 학생이 중심을 잡고 벌떡 일어선 것이다. 우와! 웃음소리는 함성으로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엄청난 순발력과 파워에 감탄했다. 하지만, 함성은 오래가지 못해 다시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그 학생이 결국은 뒤로 자빠지며 영상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영상 안에서 우당탕탕 넘어졌던 그 학생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 이 자리에서 함께 웃고 있구나. 그저 우스꽝스러운 남의 모습에 킬킬대며 시간 낭비하는 자리로 치부했던 나를 떠올렸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날의 실수와 좌절들을 모아 함께 공유하는 이 시간은 그것을 극복한 자신을 축하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또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이유는 이미 스스로 일어서는 일을 겪어보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루소는『에밀』에서 “에밀을 매일 들판 한가운데로 데려가 맘껏 내달리며 뛰어놀게 하고 하루에 100번은 넘어질 수 있게 해 준다.”라고 했다. 넘어져서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우리와 달리, 루소는 아이가 자라는 동안 ‘전혀 다치지도 않고 고통을 모르는 채’ 자라는 것을 걱정했다. ‘칼을 잡게 되어도 칼자루를 쥘 힘이 없어 깊게 벨 일도 없는’ 상태를 더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1)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결국 넘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다. 무거운 돌이 매달린 듯한 몸과 마음은 힘을 빼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때로는 그냥 넘어져 버리는 것이 어쩌면 성장의 시작점인지도 모른다. 넘어지지 않으면 일어설 기회가 없고, 그래서 일어서는 법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긴장을 풀고 냅다 넘어져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 변화가 일어난다.


인생은 원래 좌절의 연속, 삶을 무균실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덧)

정작 나는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눈 위에서 버둥버둥거리기를 반복할 뿐, 일어나려고 기를 쓸 때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스스로 일어나지를 못하니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누군가가 나타났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다 나를 도와주러 온 친구, 넘어진 뒤에 지쳐서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사고가 난 줄 알고 달려온 친구, 눈더미에 빠져 버둥대는 나를 건져준 선생님, 스키 부츠를 벗게 도와준 친구. 넘어졌을 때마다 내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등 뒤를 슬쩍 밀고 지나갔다.


사는 동안 넘어지고 구른 일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가 혼자 일어선 줄 알았다.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를 일으킨 누군가들에게 문득 감사한 마음이...




※ 참고문헌

『프랑스 아이처럼』. 파멜라 드러커맨. 북하이브. 2013.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뜬금없는 도전으로 노르웨이 폴케호이스콜레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그냥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 쓰듯이 쓰는 중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