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것이 목적인 삶의 쓸쓸함
어제저녁에 유도 동메달 전을 봤다.
유도 규칙은 잘 모르지만 한국 선수가 출전한다는 자막이 떴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가지고 있는 많은 모순과 문제점들을 입으로 떠들 수 있지만, '우리 편'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에 눌러앉게 했다.
체급이 높은 두 남자 선수가 나와서 어찌어찌 버둥버둥하더니, 어느 순간 심판이 한국 선수가 이긴 것으로 결정을 했다. 동메달이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던 것 같다. 선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경기장을 내려오다가 도복 소매로 땀인지 눈물인지를 연신 훔쳐내는 것을 보았는데 괜히 뭉클했다.
몇 분 간 광고가 이어지더니 선수의 인터뷰가 나왔다. 여태 땀을 쏟아내는 통에 두꺼운 도복이 푹 젖어있는 듯 보였다. 기자가 선수에게 경기 후 눈물을 흘린 이유를 물었다. 선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동메달이라서 아쉽고 다음 올림픽 때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답했다.
쌍팔년도 시절에 보던 방송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 시절, 은메달을 따고도 눈물로 사죄하던 수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런 장면들이 떠오르며 탄식을 하려던 찰나,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기자가 토닥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000 선수, 동메달도 정말 대단한 거예요.”
다행이었다. 세상이 변했으니 정신머리 바른 기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이어진 선수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선수는 그동안 아시안게임 등등 여러 대회를 나가서도 은메달, 동메달을 땄지만 금메달을 못 땄다고 했다. 겨우 여기까지인가, 내 한계인가 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금메달 하나만 생각하면서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들도 못하고 참으면서 유도만 했단다. 오늘 경기에 전혀 만족감이 들지 않는다며 약간 울먹인 것도 같다. 그리고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다음 올림픽에서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약속인 듯 다짐인 듯한 말을 몇 번인가 더 반복했다.
세계에서, 지구상에서, 외계 인류가 발견되지 않은 지금 어쩌면 우주에서, 유도를 가장 잘하는 3인 중 한 사람이 되었는데 기쁨도 행복도 없는 장면이었다. 1등만 생각하며 살았고, 그래서 1등이 아닌 지금은 웃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삶이 무척 안쓰럽고 슬펐다. 그리고 그걸 누군가는 승부욕이나 목적의식, 근성, 인내, 끈기, 극기, 뭐 그런 단어들로 설명해 낼 것을 생각하니 그냥 좀 씁쓸했다. 세상이 변하여 기자가 나서서 선수를 위로해 주는 시대가 되었는데, 경쟁과 경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자란 선수는 안심할 수가 없다.
한국이 지금 5위인가 6위인가 그렇다(뭐 변동되겠지만). 아니 이 조그만 나라에서 웬 강자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걸까. 체육 분야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독기 품고 악바리처럼 참으면서 남을 이기든 자신을 이기든 아무튼 이기는 것에 매달리는 사회, 이기는 것에 인생을 바치는 삶이 문득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뭐에 열광하고 감동하며 손뼉 치는 걸까.
예전에 꽤 오랫동안 수영을 다닌 적이 있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하고 농담 따먹기가 가능해질 만큼 다녔다. 어느 날 수영강사가 바뀌었는데, 첫날부터 두 명씩 짝을 지어 시합을 시키는 것이었다. 취미로 즐겁게 건강관리하러 오가던 사람들이었는데 그중 절반은 예고 없이 치러진 경쟁에서 패배자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강사는 진 사람들을 모아 다시 두 명씩 짝지어 시합을 시키고, 그 두 번째 시합에서 진 사람들을 다시 모아 재시합을 시켰다.
수강생들의 승부욕을 끌어올리려는 듯 강사의 고함소리가 수영장에 가득했는데, 수강생들은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사색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그날 수강생들은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뽑아내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그냥 주에 두어 번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수영하던 사람들이 ‘준비 땅’ 하는 순간 죽을 둥 살 둥 숨도 안 쉬고 헤엄을 친 것이다.
그다음 시간에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수영장에 나오지 않았다. 나도 며칠인가 후에 그만두었다. 나약한 정신과 허약한 신체를 가진 루저들이라고 이야기되었을까. 물에도 뜨지 못했던 내가 수영이랍시고 물장구치며 뿌듯해하던 시간이 사라졌고, 물속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던 시간이 흩어졌을 뿐이다.
어떤 활동이든 경쟁이 주가 되고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면 그 활동의 의미가 왜곡되어 버린다. 마찬가지로 삶의 목적이 이기는 것이 되면 삶의 의미가 왜곡되어 버린다.
나는 스포츠의 본질이니 뭐니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한 사람의 삶을 생각해서 그 유도 선수가 다음번에 금메달을 따든 안 따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유도가 즐겁다, 유도하기를 잘했다. 유도를 하는 내가 좋다' 뭐 그런 소리를 하며 웃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유도는 정말 행복한 운동이구나 하며 함께 즐거워하면 좋겠다.
삶의 목적은 이기는 것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