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하얀 나비

나무에 피는 연꽃 " 목련"

by 하얀 나비



작은엄마 아들의 보증 사건으로 집안이 모두 길거리로 나앉게 되고 난 뒤로 우리는 캐나다에 이민을 오게 되었고 작은엄마의 소식도 알 수가 없었다.


작은엄마는 결혼하고 몇 개월 안 되어서 남편을 잃고 아들을 낳아 혼자 키우시며 오직 아들만을 위해서 사셨다.


작은엄마의 아들은 누명을 쓰고 학살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해당되었다.


연좌제는 범죄자의 가족이 대를 이어 범죄자와 똑같이 대우를 받게 되는 제도이다.


취업제한이 있고 모든 출세의 길이 차단되었다.


자식의 바람막이가 되어줘야 할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어서도 자식의 앞길을 막아버린 어이없는 상황이 되었다.



작은엄마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고무줄 총으로 나는 새를 맞춰 잡을 정도로 똑똑했다.


외모 또한 출중하여 외국의 영화배우처럼

키도 크고 잘생겼다.


작은엄마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 자신이

연좌제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공부를 잘해도 소용이 없다는 현실에 좌절하였다.


그래서 책을 내려놓고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그때 어린 나를 붙잡고 가르쳐준 노래가 “동그라미 그리려다” 로 시작되는

“얼굴”

이라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노래였다.


할 수 있는 게 다 막혀서 결국 전기제품 고치는 일을 했다.

마침 옆가게에 미모의 참한 여자가 의상실을 하게 되었다.

둘은 오가며 사랑을 꽃피우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 쪽 부모님이 딸이 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것을 걱정하여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래도 여러 번 찾아뵈었고 진심이 통하여 허락을 받아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장인 장모님께 자주 찾아뵙고 명절 때나 생일 때마다 인사를 드렸다.



경찰서장을 지내셨던 장인과 장모님은

남자답고 자상한 사위를 제일 좋아하게 되셨다.

작은엄마 아들도 든든한 새로운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첫째로 딸을 낳고 둘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 작은엄마의 아들은 너무 기뻤다.

이 소식을 말해주려고 전화를

들었지만 아버지가 안 계셔서 딱히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들어 친한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저 아들 낳았어요”


"아 그래? 근데 왜 나한테

전화를 했냐?”


선배가 그렇게 말해서 갑자기 말문이 막혔고 이 기쁨을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슬퍼 작은엄마의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솜씨가 좋아 옷을 잘 만들었다.

가게는 시장입구에 있었고

손님들이 하나둘 늘었다.


거기에 더해 단골 일본 손님들이 늘었다.

일본에서는 맞춤옷이 비싼데,

부인의 옷 만드는 솜씨도 좋으면서 가격도 싸서 일본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일본 대사관 부인이나 관계자들이

서울에 오면 한 번에 여러 벌씩 옷을 만들어서 가져갔다



부인은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는 일이

많아지자 일본어를 틈틈이

공부하여 일본어도 능숙하게 되었다.



주문받은 옷을 만드느라 박카스를 박스로 사다 놓고 마시면서 밤을 새워서 일했다.

가게에는 2명의 직원이 옷 만드는 보조일을 했다.

일은 점점 많아지고 바쁜 만큼 힘들었지만 돈도 많이 쌓였다.



작은엄마의 아들 내외가 같이 다니면

화보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


작은엄마는 일하는 며느리를 대신해서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셨다 그래도 힘들어하지 않으셨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들을 돌보는 것도 기쁨이었다.

그리고 오직 아들내외가 잘되기만을 바라셨다.


작은엄마의 아들은 임신 중에 발등이 퉁퉁부어서도 일을 하는 부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출퇴근을 도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집도 복층으로 구입하여 이사하고 차도 바꿨다.

부인은 여유가 생기자

전기제품을 수리하는 기술을 가진

남편에게 전자제품 대리점을 차려 주었다.


대리점은 매장이 크고 큰돈이 오갔지만 집에 가져오는 돈은 부인의 수입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다.


작은엄마의 아들이 성공한 사업자 처럼 되면서 학교 때 동창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중에는 건설업으로 잘 나가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빌려주게 되었다.

사실 빌려준 돈은 모두 부인의 돈이었다.



얼마 후 친구는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일이

해결될 것 같으니 그때 갚겠다고 했다.

작은엄마의 아들은 다시 돈을 빌려줬다.



그렇게 아들은 부인에게 말을 안 하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다.

친구의 말을 믿고 빌려준 돈은 어느새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얼마의 돈이 더 있으면 완공된 아파트를 팔아 빌린 돈을 다 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IMF가 터지기 바로 전이어서 돈줄이

막혔던 것 같았다.



작은엄마의 아들은 빌려준 돈을

포기하고 발을 빼기엔 늦은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어떻게든 그 돈을 되찾으려면

그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인이 모르게 살던 집을 은행에 잡히고, 가게를 잡히고, 사돈의 집을 잡히고, 사돈의 두 아들집도 잡히고, 직원의 집도 잡히고, 나의 오빠의 재개발 중인 새 아파트도 모두 다 담보로 잡혔다.


보증을 서거나 돈을 빌려줬던 사람 누구도 이런 상황인 것을 일이 터질 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때는 보증이라는 형식으로 집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로 보증을 서주는 게 “의리”라고 생각했었다.



오죽하면 가훈이

“절대 보증을 서지 말자”

라는 집도 있었다.



결국 일만 하던 부인이 이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충격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도 안되었다.



그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한 번도 넉넉하게 돈을 써보지도 못했고 밤을 꼬박 새우던 수많은 날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그 후 부인의 친정어머니와 친정아버지까지 그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시자 부인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하고 말았다.



두 집 안은 모두 큰 혼란 속에 빠졌다.

모두가 집을 은행에 뺏기고 길에 나앉게 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우리는 이 일이 있기 몇 년 전에 이미

이민이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IMF가 터졌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아무도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캐나다에서 가게에 매여 8년을 꼼짝도 못 했다.


그 후로 몇 년이 흐르고 SNS가 생기면서 나는 Facebook에서 작은엄마 손녀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문자를 보내는 나의 손이 반가움으로 떨렸다.


작은엄마는 항상

“두 집 틈에 딸하나인데”

하시며 나를 예뻐해 주셨었다.


그분도 나한테는 엄마나 다름없었다.

작은엄마의 며느리도 나에게 여러 가지로

배려를 많이 해줬었다.


조카가 전화번호를 알려줘서 작은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울고 있어서일까 내 목소리가 너 같지 않다고 너 맞냐고 자꾸 물으셨다.


아들의 그 일로 혼자 남겨져 도매 시장에서 험한 일을 하셨다고 했다.



지금은 정부에서 나오는 수급을 받고 살고 계셨다.

다리만 걷는 게 불편할 뿐 건강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들은 조그만 식당을 하면서 거기서 먹고 자는데 사업은 신통치 않다고 하셨다.

조금이라도 빚을진 사람들의 돈을 갚아보겠다고 아들이 열심히 일했지만 간암이라는 병만 얻었다고 하셨다.


오랫동안 아들 며느리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을 위한 준비는 하나도 못했는데 혼자 빈손으로 남겨진 상황이 억울하고 서글프다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에서 나오는 돈을 조금씩 모아 손녀부부가 애기를 데리고 찾아오면 용돈도 줄 수 있어서 좋다고 하셨다.


그 후로 몇 번 더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작은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조카의 문자를 받았다.


마음이 아려왔다.


어렵게 찾았지만 뵙지도 못하고

보내드려서 마음이 아팠다.


그 후 작은엄마의 아들에게서 엄마를 잘 보내드렸다고 전화가 왔다.


시간이 지나고 아직도 슬픔의

여운이 남아있던 어느 날 작은엄마 아들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왜 너한테 이렇게 전화를 하게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 기억에 너는 너무 어려서 언제나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말할 사람이 이제 너밖에 없는 게 미안하구나.


그냥 아무 부담도 갖지 말고 들어줘

그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서 그래”


나는 당황했다.

내가 가까이 있지도 않고 멀고 먼

캐나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드려야 하나?



그 사건으로 모두가 그의

곁을 떠나고

엄마마저 먼 길을 떠나시고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이 꼬맹이 내가 아닌

그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간암 말기라서 힘들어져

식당도 접고 얼마 전부터

엄마집에 들어와 같이 살았다고 했다.


어느 날 엄마가 늦게까지 주무시는 것 같아서

깰까 봐 조용히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나갈 때 모습 그대로 계셨다고 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셔서

병원으로 급히 모셨는데 다행히

깨어나시고 괜찮아지셨다고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고

그 상태에서 안 깨어나시면 돌아가신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했다.


엄마가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별 차이가 없는

경계에 서있는 것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 순간에도 작은엄마는

“네가 먼저 죽으면 안 되는데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데”


하고 아들을 앞세울까 봐 염려하셨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로

어떻게든 엄마보다 먼저 안 죽을 거야.



엄마 장례 내손으로 다 치르고 내가

단 하루라도 더 살고 죽을 거야”


신도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렇게 씩씩하게 말해 안심을 시켜드렸다고 했다.


통화는 계속되었다


자동차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나는 지금 의사를 만나고 나오는 길이야.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했더니 의사가

깜짝 놀라면서 이러시면 정말 큰일 납니다.


지금 당장 여기를 나가다가

큰일 날 수도 있는 상태예요.

하고 어이가 없어하더라”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들은 엄마와의 약속대로 장례식을

지낸 후로 이 세상의 모든 걸 놓아버린 것 같았다.

더 이상 살아갈 힘도 의미도 이젠 없어진 듯 보였다.


“그 양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돈이 천만 원이 넘게 있었어.

수급받은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아껴 쓰시고 나를 주려고 모으셨더라고 아휴 기가 막혀서”


그 말을 하며 울고 계신 것 같았다.

엄마의 아들 사랑엔 죽는 날까지 쉼표나 마침표가 없었다.


“나 때문에 피해를 본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죽을죄를 지었지”

“어떻게든 갚아 보려고 했지만 어려웠어”

“그 돈 빌려간 친구가 건설 중이었다는 곳에

가봤는데 짓다가 멈춘 공사 현장에 잡초가 자라고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었어.


그 친구도 사는 게 너무 어려워서 돈 달라고 말도 못 꺼냈다”


그 친구도 돈이 없다면 그 많은 돈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화 너머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 들렸다.


이렇게 통화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자기 말을 들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나는 정말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듣기만 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질문도 필요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촛불이 언제 꺼질지 모르기에 마지막 힘으로

전화를 하신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지금 이 비극적인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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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시골집에는 큰일이

한번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새엄마, 작은엄마 식구가 함께 살고 계셨는데


작은엄마의 아들이 다섯 살 때 집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그만 불이 크게 번졌다고 했다


집은 순식간에 전소되어 가족들은 한동안 갈 곳을 잃고 지인 집에 얹혀 지내다가 다시 집을 짓는데 온 힘을 쏟아야 했었다고 새엄마가 말해 주셨었다.


세월이 흐른 뒤 우리 가족이 보증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던 이 두 사건은 닮아 있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다시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게 운명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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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

그 대신 비가 많이 내린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항상 제공되는

환경에 있는 나무들은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곧잘 쓰러진다.


작은 바람이 지나간 다음날 쓰러진 나무들을 보면

뿌리가 접시처럼 생겼다.

힘들게 깊이 아래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옆으로만

뻗어도 물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쓰러진다.


얼마 후 아직 겨울이 끝나기도 전인데 뒷마당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어느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죽으면 자기가 잘 있다고 나비가 되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기도 한다고…


나는 넋을 놓고 하얀 나비를 보며 혼잣말처럼

남편에게 말했다.


“사촌오빠가 돌아가신 거 같아.”

“나에게 나 잘 있다고 인사하러 오신 거 같아.”


며칠 후 조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빠 친구분이 저에게 전화하셨는데 아빠가

며칠째 전화를 안 받는다고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가봤더니 이미 돌아가셨더라고요.”


그 말과 함께 그날의 하얀 나비가 떠올랐다.

“사촌오빠였구나.”


이젠 갚을 빚도 없고 연좌제도 없는 곳에서

하얀 나비처럼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훨훨 날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이른 봄,


뒤뜰에 있는 자색 목련이

나뭇가지를 뚫고

초록잎이 나오기 전에

꽃을 피우기 위해 봉우리를

만드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목련은 나무에 피는 연꽃

이라는 뜻이고

자목련은 숭고한 사랑을 의미한다.


꽃이 피어도 너무 빨리 져서

짧은 생애를 보여주는

슬픈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