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에 없는 선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지훈.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완벽한 선율을 들려주던 그는, 정작 30년을 함께 산 아내와의 불협화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큰 다툼도 없었고 크게 화날 일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안 공기에는 묘한 낯섦과 낮은 온도가 느껴졌다. 스킨십은 잊힌 악보처럼 멀어졌고, 떨림이 사라진 자리엔 서로를 보살펴주는 습관만이 남았다.
공연이 끝난 후의 고독은 집에 돌아와 혼자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더 깊어졌다. 피아노 덮개를 닫을 때의 둔탁한 소리는 언제나 내 생의 한 단락이 강제로 마감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는 화려한 수의(壽衣) 같았다. 무대 위에서 수천 명의 갈채를 받을수록, 정작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관객인 아내와의 사이엔 거대한 정적만 고여갔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부턴가 끊어진 현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내의 방귀 소리에
"자기는 장(腸)도 예쁜가 봐. 이렇게 예쁜 소리를 내는 걸 보면"
이라며 어렵게 꺼낸 농담에도 그녀는 웃음 대신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명성과 바꾼 고독은 나를 짓눌렀고, 나는 돌연 모든 연주 스케줄을 취소한 채 도망치듯 빈(Vienn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악보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잃어버린 생의 선율을 찾고 싶었다.
함께 떠나겠느냐는 물음에 아내는 답이 없었다. 다만 돌아올 때쯤이면, 우리 중 누군가는 조금 달라져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뿐이었다.
빈의 낯선 거리,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를 목적 없이 서성였다. 화려한 연주홀이 아닌, 이름 모를 작은 카페의 창가에 앉아 나는 끊임없이 자책했다. "완벽한 연주란 무엇인가?" "내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러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곳이 <카페 슈페를>이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 구석에 놓인 낡은 피아노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내와는 전혀 다른,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행자 수진이었다.
그녀는 돋보기를 고쳐 쓰며 낡은 자수보와 악보를 번갈아 훑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쇼팽의 야상곡. 박자는 어긋났고, 가끔은 틀린 음을 짚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서툰 연주에는 내가 수십 년간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있었다. 기교 없는 진심, 그리고 삶의 향기.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악보에 없는 선율'이었다.
"길을 잃어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도 있다지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내 가슴속 끊어져 있던 현 하나가 파르르 떨렸다. 완벽한 리허설만 반복하던 내 인생에, 예고도 없이 낯선 음표 하나가 끼어든 순간이었다